두 번째로 소율한을 마주친 건, 내가 먼저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연도 아니었다. 왕부 안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은 이 집 안에서의 관계를 가장 형식적으로, 그리고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매월 초하루, 정실은 섭정왕에게 문안을 드린다. 형식적인 자리였다.
하지만 원작 속 연서하에게는 늘 형식으로 끝나지 않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날이 되면 감정을 쏟아냈고, 따지고, 집착했고, 결국은 소율한과 부딪혔다. 그래서 소율한은 초하루가 다가오면 자리를 피하거나, 가능한 한 짧게 끊어내려 했다. 오늘이 바로 그 초하루였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게, 그렇다고 성의 없어 보이지도 않게, 그저 정실이라는 위치에 맞는 선에서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 느낌이 들도록 힘을 뺀 차림이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신구는 어떻게 하실까요, 마마."
나는 거울을 보며 짧게 답했다.
"간단하게."
시녀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연서하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소율한의 집무실은 왕부 안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서자, 숨이 조금 얕아졌다. 정원에서 잠깐 스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정식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글로 읽던 인물과, 실제로 마주해야 하는 존재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신 차려. 시녀의 목소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왕비마마 납시오."
잠시 후, 안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들라."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소율한은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문서를 보고 있었고, 내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곧바로 다시 문서로 돌아갔다. 의도적인 무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나는 정해진 자리에 섰다.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낮추려다, 아주 잠깐 멈칫했다. 원작 속 연서하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고, 그 선택이 또다시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망설임을 길게 끌지 않았다.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형식대로.
"문안 드립니다, 왕야."
처음 입 밖으로 꺼내는 호칭이었다. 소율한이 문서에서 눈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봤다. 짧은 시선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확인’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예상과 다르다는 듯한, 아주 미묘한 변화.
"앉아라."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 시녀가 차를 내왔다. 소율한은 다시 문서를 봤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원작에서 연서하는 이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말을 꺼냈고, 결국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를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았다. 시선은 굳이 소율한에게 두지 않고, 창가 쪽으로 가볍게 흘렸다.
그가 문서를 보는 동안, 나는 그 시간을 그대로 두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소율한이 붓을 내려놓았다.
"할 말이 없느냐."
나는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없습니다."
그가 나를 봤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문안 인사가 전부냐."
"형식적인 자리니까요."
짧게 답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왕야께서 바쁘신 것 같아 오래 머무르면 실례일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난 뒤에도, 방 안은 잠깐 고요했다. 소율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머무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을 돌리려던 순간.
"연서하."
이름이 불렸다. 호칭 없이. 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봤다. 소율한이 나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쉽게 꺼내지 않는 눈이었다.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몸은 괜찮으냐."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아주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곧 조용히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 나가면서,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
긴장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런데. …왜 그 말이 계속 남지.
몸은 괜찮으냐. 형식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정실에게 할 수 있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 그런데 이상하게, 그냥 흘려보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정신 차려, 이서하.
같은 시각.
소율한은 다시 문서를 펼쳤다. 하지만 글자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서하가 무릎을 꿇었다. 형식대로.
조용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지지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고, 오래 머무르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는 붓을 손에 쥔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이 자리는 늘 시끄러웠다. 연서하가 말을 쏟아내고, 소율한이 끊어내고, 그게 반복되던 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초하루가 되면 피하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는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방금도. 무언가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꾸 눈에 밟힌다. 소율한은 그 생각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다시 문서를 펼쳤다. 이번에는, 글자가 조금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흘 후였다.
아침부터 왕부 안의 공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어수선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시녀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탓인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낮은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갔다가 내가 가까워지면 급하게 끊겼다. 나를 향해 머물던 시선은 내가 돌아보는 순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흩어졌고, 그 반복이 몇 번이나 이어지자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백운경이 찾아온 건 오전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평소보다 늦은 발걸음과 굳어 있는 표정만으로도 상황이 얼마나 퍼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나서야 입을 열었고, 평소처럼 바로 말하지 않고 아주 짧게 숨을 고른 뒤에야 낮게 말했다.
"왕부 안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용은."
"마마께서 왕야 몰래 다른 사내와 사통했다는 소문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고,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놓으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흐름이었고, 며칠 전 소진서가 남기고 간 말이 이 상황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출처는."
"추적 중입니다."
"정여주 쪽."
백운경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쪽 시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이며 더 묻지 않았고,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시작했느냐보다 이 소문이 어디까지 퍼졌느냐와, 그리고 소율한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내 동선 전부 기록해. 누구를 만나는지도 빠짐없이."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소문 알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게 해."
짧은 지시였지만 충분했다. 나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방을 나섰다. 왕부 안을 걸었다.
일부러 숨지 않았고, 오히려 더 평소와 같은 속도로, 같은 자세로 걸으며 시선을 떨구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수군거림이 귀에 닿았다가 사라졌고, 내가 가까워질 때마다 끊기는 그 흐름이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지나갔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정여주와 마주친 것도, 그 타이밍이 지나치게 정확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고, 그 표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마마, 혹시 들으셨어요?"
"뭘요?"
"요즘 왕부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왔다가 멈췄고,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걱정하는 눈이 아니었다. 반응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내가 무너지는지, 화를 내는지, 아니면 소란을 피우는지를 확인하려는 시선이었다. 나는 아주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그녀의 눈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소문이요. 들었어요."
"그럼—"
"괜찮아요."
나는 부드럽게 말을 끊었고, 시선을 놓지 않은 채 덧붙였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순간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몸이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더 말을 이어가지 않고 돌아섰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손목이 강하게 잡혔다.
예상하지 못한 힘이었다. 순간 몸이 그대로 멈췄고, 반쯤 돌아서며 균형을 잡으려던 찰나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소율한이었다. 너무 가까웠다.
손목을 잡고 있는 힘이 생각보다 거칠었고, 놓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단단하게 조여 있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분명히 눌린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왕야."
그제야 그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소문은 들었겠지."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히 거칠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이 정도로 왕부 전체가 들썩일 만큼 이야기가 퍼졌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가길 바라는 건가."
말이 길어질수록 감정이 더 드러났다. 억누르고 있었지만,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상태였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의 눈이 더 좁혀졌다.
"없다고?"
짧게 되묻더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소문이 전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만든 이야기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설명이 필요할 텐데, 그냥 없다고 하면 내가 납득해야 하나."
나는 손목을 잡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힘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헛소문입니다."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
"…세자냐."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며칠 전 왕부에 왔고, 그 뒤로 바로 이런 말이 돌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맞아떨어지지 않나. 그놈과 만나는 거냐."
나는 잠깐 숨이 막혔지만,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 정도 소문이 돌 정도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건 너도 알 텐데."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짧게,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파고들었다. 거짓을 찾으려는 눈이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복도에 흐르던 공기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제 동선 전부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의 손에 힘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완전히 놓지는 않았지만, 처음과는 달랐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손을 놓았다.
"조사하겠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돌아섰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목에 남은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거칠었다.
그리고 — 이유를 모르는 감정이었다.
같은 시각.
소율한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소문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내용 때문인지.
다른 사내. 그 생각이 유독 거슬렸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확인한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