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짧고 단호하게, 망설임 없이 두 번 울렸고, 아까 차를 가져다주던 시녀의 조심스러운 기척과는 전혀 다른 결의였다. 그 아이는 숨을 죽이듯 들어왔지만, 이 소리는 이 방의 공기를 한순간에 정리해버릴 만큼 건조하고 분명했다. 나는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남자였다. 스물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무채색의 단정한 옷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하고 있었고, 표정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눈만은 살아 있었다. 방 안을 한 번 훑은 뒤, 시선이 곧장 나에게 꽂혔다. 짧고, 날카롭게. 나는 그를 알아봤다. 백운경.
연서하의 측근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감시자에 가까운 존재, 연서하 집안이 심어둔 사람으로 그녀가 선을 넘는 순간 보고하고 필요하다면 막는 역할을 맡은 인물. 그리고 — 원작에서. 연서하가 죽던 날, 그 자리에 있었던 남자.
…끝내, 말리지 않았던 사람.
"왕비마마."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에 가라앉았다. 왕비. 그 호칭이 묘하게 귀에 걸렸다. 이름뿐인 자리,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여전히 왕비였다.
"무슨 일이야."
"오늘 아침 일과를 취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십니까."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확인. 혹은 감시.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원작의 연서하였다면 이쯤에서 짜증을 냈을 것이다. 왜 네가 그런 걸 묻느냐고, 선을 넘었다고. 그래서 백운경은 늘 벽처럼 굳어 있었고, 감정을 주지 않았다.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피곤했어. 지금은 괜찮다."
가능한 한 평온하게 말했다. 날이 서지 않도록 눌러 담은 목소리였다. 그 순간, 백운경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너무 짧아서 놓칠 뻔했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서서 나를 보고 있었고, 마치 눈앞의 사람이 정말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시선을 훑었다. 나는 먼저 시선을 거두고 창밖으로 향했다.
"백운경."
"예."
"앞으로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돌려 말하지 말고."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고, 길지는 않았지만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처음보다 아주 미묘하게 결이 달라져 있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걸음이 멈췄다. 등이 눈에 띄게 굳었다.
"네가 날 감시하는 거, 알아."
공기가 한순간 멎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기지 않아도 돼. 대신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그의 등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아무도 해칠 생각 없어. 그냥 조용히 살 거야."
잠깐 숨을 고르고.
"믿든 안 믿든 — 그건 네 선택이고."
침묵이 길어졌다. 이번에는 분명히 무게가 있었다. 백운경이 천천히 돌아섰다. 처음으로, 나를 ‘읽으려는’ 눈이었다.
의심, 계산, 그리고 아주 얇게 스친 낯선 기색.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의 대치 끝에, 그가 먼저 눈을 내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야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믿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은 씨앗 하나면 충분하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고, 대신 기억은 쌓인다.
그리고 백운경은, 원작에서 누구보다 오래 연서하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말은 결국 누구보다 이 사람을 오래, 가까이서 볼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멀리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소율한을 처음 마주친 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왕부 안쪽 정원, 아직 아침 공기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시간에 가볍게 산책을 나왔다가 —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그와 마주쳤다. 원작에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부딪히는 흐름이었는데, 이건 분명 예정에 없던 장면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무관복 차림, 형식적인 복장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쓰는 사람의 옷이었고, 막 수련을 마친 듯 어깨와 옷자락에 옅은 땀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어서, 활자로만 읽던 인물이 아닌 실제 존재로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도 멈췄다.
짧은 정적이 흐르며, 서로 사이의 거리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선 하나 흐트러진 곳 없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이었고, 그 완벽함이 오히려 사람의 온기를 지워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숨이 아주 미세하게 얕아졌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이었다.
차갑고, 계산적이고, 그래서 더 멀게 느껴지는 눈. 가까이 서 있는데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따른다고 했구나.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가,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짧았지만 의미는 충분했다. 왜 여기 있냐는 질문.
"산책입니다."
나도 짧게 답했다. 그의 시선이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사람을 재듯이 훑는 시선이었다. 연서하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그대로 가늠하는 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맞서지도, 피하지도 않은 채, 그저 지나가려던 사람처럼 서 있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발끝이 이슬 맺힌 돌에 미끄러지며 중심이 무너졌고, 그대로 앞으로 쏠린 몸이 예상보다 빠르게 기울었다. 짧은 찰나였다. 손목이 잡혔다.
단단한 힘이었다. 순간 숨이 멎은 것처럼 멈췄다. 생각보다 — 너무 가까웠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하지."
낮게 떨어진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내려왔다.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는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얼굴은 더 완벽했고, 그만큼 더 차가웠다. 손목을 잡고 있는 힘은 강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먼저 눈을 떼고 싶은 쪽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정적이 흐른 뒤에야 손이 풀렸다. 나는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짧게 말하고, 더 붙잡히지 않도록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정원 모퉁이를 돌아선 뒤에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첫 단추는 넘겼다. 다가가지 않았다. 집착하지 않았다. 원작의 연서하와 다르게. 그것만으로도 흐름은 분명히 바뀌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반칙이다. 실물은.
정말. 반칙이었다.
같은 시각.
소율한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까지 잡고 있던 감각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썹을 모았다.
이상했다. 연서하를 안다고 생각했다. 집착하고, 소란스럽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 그런데 방금 본 사람은. 전혀 달랐다.
다가오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할 말만 하고. 물러났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가 사라진 모퉁이를 바라봤다. 이 여자가.
…뭔가 다르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감각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