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 수요일, 회사 전체가 분주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규모 합작 프로젝트를 위해 외부 파트너사 인력이 상주하게 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번 프로젝트 총괄로 오는 사람이 꽤 유명하다던데."
하린이 회의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어떤 사람인데?"
"제갈도진이라고, 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인재래.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채령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 파트너사 인력이 상주한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좀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원하는 건 무조건 손에 넣고야 마는 스타일이라나."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다 그렇지 않을까."
채령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그 이름이 앞으로 자신의 일상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최상층 회의실에서는 계열사 임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낯선 인물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여유로운 미소를 띤 남자, 제갈도진이었다. 훤칠한 키에 세련된 정장 차림, 여유가 몸에 밴 태도였다. 그의 등장에 회의실 안의 몇몇 임원들이 술렁였다.
"이번에 저희 쪽에서 합작 프로젝트 건으로 몇 주간 이곳에 상주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담담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문득,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던 백결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랜만이네, 백결 이사."
"그러게. 이런 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두 사람의 짧은 인사 속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팽팽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제갈도진이 먼저 백결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인데, 커피라도 한잔할까."
"바빠서."
백결이 짧게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제갈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라도. 여기 있는 동안 자주 볼 사이 아니겠어?"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듣자니, 요즘 연애하냐는 소문이 있던데."
백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왔거든. 디자인팀 신입사원이라고."
제갈도진의 눈빛에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백결은 대답 대신 그를 지나쳐 회의실을 나섰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
며칠 뒤, 디자인팀 회의에 제갈도진이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문의 그분이 우리 팀 회의에 온다고?"
하린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응, 합작사 쪽 담당자래. 이번 프로젝트 총괄이라던데."
회의실에 들어선 제갈도진은, 예상과 달리 편안한 미소로 팀원들을 대했다. 자기소개를 마친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채령에게서 멈췄다.
"진채령 씨, 맞죠?"
갑작스러운 호명에 채령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디자인 시안 자료, 미리 좀 봤는데. 감각이 좋으시더라고요."
담담하면서도 여유로운 어조였다. 채령은 얼떨결에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어딘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그의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무는 느낌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제갈도진이 자연스럽게 채령의 옆으로 다가왔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프로젝트 관련해서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업무 관련이시면."
회의실 한쪽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채령 씨는 이 회사, 오래 다닐 생각이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채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그런 건 생각 안 해봤는데요. 왜 그런 질문을."
"그냥, 궁금해서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은 없는지."
제갈도진이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채령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저희 회사도 디자인팀 확장 중인데, 혹시 관심 있으면 좋은 자리 마련해드릴 수 있어요."
"…감사하지만, 지금 회사에 만족하고 있어서요."
채령이 단호하게 답했다. 제갈도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채령 씨, 백결 이사랑 친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뜻밖의 질문에 채령이 순간 멈칫했다.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요? 근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제갈도진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채령은 그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다.
"…프로젝트 관련 얘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맞다. 미안해요. 그냥 궁금해서."
그가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지만, 채령은 그 웃음이 어딘가 계산된 것처럼 느껴졌다.
'…뭐지, 이 느낌.'
채령은 그가 회의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딱히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은, 묘하게 신경을 긁는 태도였다.
같은 시각, 이 모습을 옆 회의실 창을 통해 지켜보던 백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저 자식, 또 시작이네."
옆에 있던 태오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질투하는 거야?"
"아니. …그냥, 저 자식 하는 짓이 늘 저래서 그래. 남이 아끼는 거 보면 괜히 건드려보고 싶어 하는."
"그래도 이제 채령이랑 진짜 사귀는 사이잖아. 저 자식이 알면 좀 골치 아파지겠는데."
태오의 말에 백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알아도 상관없어. 이제 숨길 생각도 없으니까."
"그래도 조심해. 저 자식, 원하는 거 위해서 수단 안 가리는 성격인 거 알잖아."
"…알아. 근데 이번엔 그때랑 달라. 채령이는 이제 확실히 내 사람이니까, 함부로 못 건드릴 거야."
백결의 목소리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 확신이 오히려 조금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지 마. 저 자식은 항상 예상 밖의 수를 쓰니까."
"…알겠어. 조심할게."
백결은 그렇게 답했지만, 여전히 회의실 쪽을 향한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오랜 라이벌의 등장이, 앞으로 이 관계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지, 그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