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 금요일 저녁, 백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오늘 시간 돼? 할 얘기가 있어서."**
메시지를 확인한 채령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지난 며칠 사이 그가 여러 번 흘렸던 말들, "곧 알게 될 거야"라는 그 의미심장한 여운이 떠올랐다.
**"…응, 시간 돼."**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루프탑 카페였다. 채령이 도착했을 때, 백결은 이미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왔네."
"…응. 근데 오늘따라 좀, 긴장되는 자리인 것 같아서."
채령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노을이 강 위로 붉게 내려앉고 있었다. 백결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맞아. 좀 중요한 얘기야."
그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채령은 그 모습이 낯설었다. 늘 담담하고 흔들림 없던 그가, 오늘은 확연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결은 손에 든 잔을 몇 번이고 매만지다가, 결국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백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채령이 너, 창가 자리에 앉아서 늘 혼자 그림 그리고 있었잖아. 쉬는 시간마다."
"…어, 그랬지. 근데 그걸 어떻게."
"나는 그때, 항상 네 뒷모습을 봤어. 대놓고 말 걸 용기는 없어서, 그냥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채령은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무슨."
"좋아했어, 그때. 근데 말할 용기가 없었어. 그러다 졸업했고,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었어."
백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근데 결아, 대체 왜 나였어? 그때 나, 진짜 눈에 띄는 애 아니었는데."
채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백결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듯 시선을 두다가, 낮게 답했다.
"기억나? 2학년 초에, 반 애들 몇 명이 너 자꾸 괴롭혔던 거."
채령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오래전, 애써 지워버렸던 기억이었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녀의 집안 사정을 두고, 몇몇 아이들이 대놓고 놀리고 물건을 숨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그날 체육복 없어졌다고 애들이 너 놀리는 거, 내가 지나가다 봤어. 별생각 없이 그냥,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백결이 옛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그 뒤로, 이상하게 네가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잖아. 그게 되게 신기했어."
"…그때 나, 그냥 억지로 괜찮은 척한 거였는데."
"그래도 밝아 보였어. 적어도 나한테는.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자꾸 신경 쓰였어."
백결의 담담한 고백에, 채령은 그제야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맞춰나갔다.
"…나도, 그때 그 일 때문이었어. 네가 그렇게 무심하게 한마디 해준 거, 그게 나한테는 되게 크게 다가왔어. 아무도 안 나서주던 상황이었는데."
"…그랬구나. 나는 그냥,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게 더 좋았어. 대단한 각오로 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 같아서."
채령의 말에, 백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회사에서 다시 채령이 이름을 발견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어. 이런 우연이 진짜 있을 수 있나 싶어서."
채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처음부터 나한테."
"어. 처음부터 알아봤고, 처음부터 다가가고 싶었어. 십 년 가까이 묻어뒀던 마음이니까, 이번엔 제대로 전하고 싶었어."
백결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채령아. 나랑 만나줄래."
담백하지만 확고한 고백이었다. 채령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학창시절 자신이 몰래 품었던 마음이, 사실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밀려오는 벅찬 감정으로 다가왔다.
"…나도."
채령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때 너 좋아했었어. 근데 나도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냥 혼자 마음에 담아두고 졸업했어."
그 고백에, 이번엔 백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이야?"
"어. 그러니까, 이거 완전히 같은 마음이었네. 십 년 동안 서로 몰랐던 거."
채령이 눈물이 살짝 맺힌 채로 웃으며 답했다. 백결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십 년이나 돌아서 왔네, 우리."
"그러게. 근데, 이렇게라도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그럼, 이제 대답해줘. 나랑 만나줄 거야?"
"…응. 만나자, 우리."
채령의 대답에, 백결의 얼굴에 처음 보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늘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던 그의 얼굴에서,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근데, 이제부터는 회사에서도 좀 편하게 대해도 될까?"
채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이지. 이제 굳이 이사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
"그럼 나도, 이제 진짜 채령이라고 불러줘. '씨' 빼고."
"이미 그러고 있었잖아."
백결이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채령도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강 위로 내려앉은 노을처럼, 두 사람 사이의 공기도 따뜻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 아래, 강물 위로 불빛들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채령이 걸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근데 이상하게, 처음 채령이 다시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은 있었어."
"그건 좀 자신감 과하다."
"확신이었다고 해두자."
백결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채령도 따라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먼저 다가간 스킨십이었다. 백결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싫어?"
"아니, 좋아서."
그가 그녀의 손을 더 꼭 마주 잡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오래도록 강변을 걸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을 돌아, 마침내 서로를 향해 마주 선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한적한 벤치 앞에 이르러,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강바람이 부드럽게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진짜, 평생 기억날 것 같아."
채령이 강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십 년 전부터 오늘까지, 이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백결의 담담한 고백에, 채령이 그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백결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해도 돼?"
낮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채령은 대답 대신 살짝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백결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강물 위로 반짝이는 불빛들이,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진 후, 채령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떨려."
"나도. 근데, 좋은 떨림이야."
백결이 옅게 웃으며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채령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오래도록 그 온기를 만끽했다.
같은 시각, 회사 사무실에서 야근 중이던 강태오는 백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 하나를 확인했다.
**"채령이가 나 만나준대."**
태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축하한다, 진짜."**
**"십 년 걸렸다. 근데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
**"근데 더 놀라운 건, 채령이도 그때 너 좋아했었다는 거야. 완전 서로 몰랐던 짝사랑이었네."**
태오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 사실이 못내 놀라운 듯, 그는 몇 번이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와, 이거 진짜 드라마 같은 얘기네. 십 년 동안 둘 다 서로 몰랐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아직도 얼떨떨해."**
**"그동안 혼자 끙끙 앓던 게 다 보상받는 기분이겠다."**
**"어. 진짜 그런 기분이야."**
짧은 답장을 확인하며, 태오는 창밖의 야경을 바라봤다. 오랜 친구가 마침내 찾은 행복에, 그도 진심으로 기뻤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앞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태오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그 밤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