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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의 첫사랑은 나였다

04화 · 전체 23

"이사님 아니고, 그냥"

글 · 힐링아무

그 주 토요일, 채령은 백결에게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잠깐 나올래?"**

짧은 메시지였지만, 채령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답장을 보냈다.

**"…네, 괜찮아요."**

약속 장소로 나온 백결은, 평소 회사에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편안한 차림이었다. 셔츠에 슬랙스 차림만으로도 분위기가 확연히 가벼워 보였다.

"오늘은 이사님 아니고 그냥, 백결로 있을게."

그가 먼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채령도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그럼 저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오늘은."

"그냥 이름 불러. 아니, 그보다."

백결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 이제 말 편하게 하자. 어차피 동창이잖아."

뜻밖의 제안에 채령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요?"

"회사에서만 아니면, 굳이 이렇게 예의 차릴 사이도 아니지 않나."

"그건 그런데… 갑자기 말 놓으라니까 좀 어색하네요."

"천천히 하면 돼. 나부터 놓을 테니까."

백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채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노력해볼게."

어색한 반말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한층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근처 한적한 거리를 따라 함께 걸었다. 회사 얘기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꺼내지 않았다. 대신 시답잖은 이야기들, 좋아하는 음식이나 최근 본 영화 같은 소소한 화제들이 오갔다.

"채령이는 주말엔 보통 뭐 해?"

"그냥, 집에서 쉬거나 하린이랑 카페 가거나. 특별할 거 없어."

"의외로 평범하네."

"백결이는?"

"나도 비슷해. 생각보다 특별할 거 없어."

"에이, 설마. 재벌집 아드님이 평범하게 주말을 보낸다고?"

채령이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백결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그렇게 특별할 거 없어. 어릴 때부터 워낙 바빴어서, 오히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걷는 게 낯설 정도야."

"그럼 오늘은 특별한 날이네."

"…그러게. 특별한 날이네."

그가 나지막이 답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담긴 온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채령은 순간 시선을 피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걸었다. 회사에서 볼 때와는 다른, 훨씬 편안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작은 골목의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으며, 채령은 문득 그가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다닐 때는 이런 표정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때는, 이럴 상황이 별로 없었으니까."

백결이 담담하게 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채령은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근데 그때, 나랑 접점이 딱히 없었잖아. 근데 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는지, 아직도 궁금해."

채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백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답했다.

"…그것도 곧 말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계속 그렇게 나중에, 나중에 하는데."

"이번엔 진짜 얼마 안 남았어."

그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 미소에 담긴 확신이, 채령의 마음을 이상하게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근데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니까, 오히려 더 긴장되는데."

"긴장할 거 없어. 나쁜 얘기 아니니까."

"그럼 좋은 얘기야?"

"…적어도 나한테는, 아주 오래 기다려온 얘기야."

백결의 담담한 대답에, 채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말속에 담긴 무게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걷던 길, 백결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채령아."

"…응?"

"요즘, 나 때문에 회사에서 불편한 거 없어?"

뜻밖의 질문에 채령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신경 쓰여서. 나 때문에 채령이가 괜한 시선 받는 거 아닐까 하고."

백결의 목소리에 담긴 조심스러움에, 채령은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괜찮아. 오히려,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게 더 신기해."

"신기할 것까지야."

"아니야, 진짜로. 백결이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

채령의 솔직한 말에, 백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곧 다 알게 될 거야."

낮게 흘러나온 그 말에, 채령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뭔가 중요한 순간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감돌고 있었다.

"근데 채령아."

백결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응, 왜."

"만약에 말이야. 내가 채령이한테, 그냥 회사 사람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뜻밖의 질문에 채령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갑자기 그게 무슨."

"그냥, 궁금해서. 만약에라면."

백결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채령은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

"그래. 그럼 그때 가서 제대로 물어볼게."

백결이 옅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채령은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심장이 쉴 새 없이 뛰는 걸 느꼈다. 헤어질 무렵, 백결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오늘, 좋았어."

"…나도."

짧은 인사였지만,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이 채령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같은 시각, 자신의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남아 있던 강태오는, 백결에게서 온 메시지 하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 이번 주 안에, 채령이한테 확실히 말할 생각이야."**

태오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오랜 친구가 마침내, 십 년 가까이 묻어뒀던 마음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잘 생각했다."**

**"근데 떨리네. 이런 기분 처음이야."**

태오는 그 메시지에 피식 웃음이 났다. 회사에서는 늘 침착하고 흔들림 없던 친구가, 이런 일에는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십 년을 기다렸잖아. 이제 와서 떨 것도 없지."**

**"그러니까 더 떨리는 거야. 이번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서."**

짧은 답장을 보내며, 태오는 문득 창밖을 바라봤다. 이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어쩐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이번엔 꼭 잘 됐으면 좋겠는데.'

태오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오랜 친구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옅게 웃었다.

0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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