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사건 이후, 사무실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채령을 보는 동료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부러움이 뒤섞여 있었고, 하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매일같이 채령을 붙잡고 캐물었다.
"그래서, 어제도 또 만났어?"
"어제는 아니고. 그제."
"그제도 만났다고? 이거 완전 매일 만나는 수준인데?"
하린이 눈을 반짝이며 몸을 바짝 붙였다. 채령은 애써 태연한 척 서류를 정리했다.
"그냥 업무 때문에 마주친 거야. 이상한 거 아니고."
"업무 핑계로 매일 마주치는 게 더 수상한 거 몰라?"
채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하린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결은 정말로, 사흘에 한 번꼴로 디자인팀에 들르고 있었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확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매번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그리고 채령아, 너도 좀 이상해. 예전엔 낯가림 심했잖아. 근데 이사님 앞에서는 되게 편하게 말하더라."
"…그러게. 나도 신기해, 그건."
채령은 솔직하게 답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독 백결 앞에서는 말이 술술 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날 저녁, 야근을 마치고 나온 채령은 텅 빈 로비에서 낯익은 실루엣과 마주쳤다. 백결이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채령 씨 기다렸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에, 채령은 순간 멈칫했다.
"저를요? 왜…"
"차 태워주려고. 이 시간엔 택시 잡기 힘들잖아."
백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앞장서 걸었다. 채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 뒤를 따랐다. 차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던 채령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사님은,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잘해주는 편이세요?"
"아니."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근데 저한테는."
"채령 씨한테만."
담담하게 던진 그 한마디에, 채령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저 담백하게 진심을 흘리는 방식으로.
"…그거 되게 반칙인 거 아세요?"
채령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거요. 사람 헷갈리게."
백결이 슬쩍 그녀를 돌아봤다. 신호에 걸려 멈춘 차 안,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얽혔다.
"헷갈릴 필요 없는데."
"…네?"
"내 마음, 확실하니까."
그 말에 채령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령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방금 들은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확실하다는 그 마음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궁금해졌다.
"저기, 그럼."
채령이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이라는 거, 언제부터였어요?"
백결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신호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보다 오래됐어."
"얼마나요?"
"그건, 좀 더 있다가."
그가 살짝 웃으며 답을 피했다. 채령은 아쉬웠지만,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왠지 그 대답을 듣게 될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후, 회사 근처 카페에서 강태오와 백하린이 우연히 마주쳤다. 채령의 심부름으로 자료를 전달하러 온 하린과, 백결의 지시로 같은 카페에 들른 태오였다.
"어, 혹시 백하린 씨?"
태오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저를 아세요?"
"채령 씨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는 강태오라고 합니다. 백결 이사님 밑에서 일하고 있어요."
하린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커피를 기다리는 사이, 자연스럽게 근처 자리에 함께 앉게 됐다.
"근데 신기하네요. 이사님 쪽 사람이 저를 벌써 알고 계시다니."
"그야, 요즘 저희 쪽에서 채령 씨 얘기가 워낙 자주 나와서요."
태오가 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 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이사님이 회사에서도 채령이 얘기를 하세요?"
"직접 말은 안 해도, 티가 워낙 많이 나서."
대화 도중, 하린이 슬쩍 운을 뗐다.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사님이 원래 그렇게 여자한테 적극적인 스타일이셨어요?"
태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정반대죠. 근데 채령 씨한테는 좀 다르더라고요."
"역시 뭔가 있는 거죠?"
"글쎄요. 그건 본인 입으로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은데."
태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하린은 그 웃음에서, 뭔가 더 깊은 사연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혹시, 두 분 사이에 뭔가 옛날 얘기라도 있는 거예요?"
하린이 조심스레 떠보듯 물었다. 태오는 대답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건 백결이 직접 채령에게 말할 때까지, 자신이 대신 나설 부분이 아니었다.
"때 되면 다 알게 될 거예요."
태오가 그렇게만 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날 늦은 밤, 자신의 집무실에 홀로 남은 백결은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낮에 채령과 함께 검토했던 시안 자료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태오였다.
**"오늘 하린 씨 만났어. 채령 씨 얘기,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백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뭐래?"**
**"딱히 뭐, 눈치는 챈 것 같은데 확신은 없는 눈치더라고. 근데 백결아, 너 진짜 너무 티 내는 거 알아?"**
**"알아."**
짧은 답장에, 태오의 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십 년 만인데, 이번엔 좀 확실하게 해. 예전처럼 혼자 담아두지 말고."**
백결은 그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학창시절,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야.'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창밖의 야경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묻어뒀던 마음이, 이제야 제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