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팀 사무실에서의 첫 업무는 생각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다. 채령은 선배들이 던져주는 자료를 정리하고, 회의 준비를 돕느라 오전 내내 자리에 제대로 앉아있을 틈도 없었다.
"채령 씨, 이번 신규 프로젝트 시안 자료 좀 취합해줄래요?"
팀장의 지시에 채령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옆자리의 하린이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저거 임원 보고용 자료잖아. 신입한테 이런 걸 벌써 맡긴다고?"
"그러니까. 부담되네."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다. 백결이었다. 그의 등장에 사무실 전체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팽팽해졌다.
"이사님이 여긴 왜…"
팀장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규 프로젝트 시안,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백결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의 시선이 사무실을 훑다가, 자연스럽게 채령의 자리에서 멈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채령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또.'
주변 동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실무진 사무실까지 직접 내려오는 일은 드물었던 모양이었다.
"이사님이 직접 시안까지 보시는 건 처음 아니야?"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원래 보고서만 받아보시는 분인데."
하린이 채령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야, 아무래도 진짜 너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설마. 그냥 우연이겠지."
채령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은 이미 소리 없이 뛰고 있었다. 임원 보고 자료를 정리하던 채령은, 결국 예상대로 백결과 마주 앉아 자료를 검토하게 됐다. 팀장이 급한 다른 회의에 불려 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녀가 남아 자료 설명을 맡게 된 것이다.
"이 부분, 색감이 너무 차분한 것 같은데."
백결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이번 프로젝트 콘셉트가 차분하고 신뢰감 있는 이미지라서요. 좀 더 화려하게 가면 오히려 방향성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채령이 조심스레 설명했다.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당당히 밝히는 게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앞에서는 말이 술술 나왔다.
"…그렇군."
백결이 짧게 답하며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반응이었지만, 채령은 그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채령 씨는 원래 이렇게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었나?"
문득 그가 물었다. 채령은 순간 멈칫했다.
"…네?"
"학교 다닐 때는 되게 조용했던 것 같아서."
그 말에, 채령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학창시절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그때는… 그냥 존재감이 없었던 거죠, 뭐."
"아니, 존재감 없었던 적 없는데."
담담한 말투로 던진 그 한마디에, 채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럼 저, 그때 어떤 애였는데요?"
채령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비밀."
"…에이, 그게 뭐예요."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아니고."
의미심장한 대답에 채령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자는 무언의 신호를 읽었다. 자료 검토가 끝나갈 무렵, 백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아, 네.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채령이 자료를 정리하며 답했다. 그가 문 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채령 씨."
"…네?"
"혹시 점심은 먹었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채령은 당황했다.
"아직이요. 자료 준비하느라."
"그럼 같이 먹죠. 마침 나도 아직이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채령은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 그래도 될까요? 이사님이랑."
"안 될 이유 있나."
백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채령은 결국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하린이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근처 조용한 식당, 채령은 백결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상황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정작 백결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런 데 자주 오세요?"
채령이 어색함을 감추려 먼저 말을 꺼냈다.
"가끔. 사람 없는 시간에."
"그럼 오늘은 왜 이 시간에."
"…채령 씨랑 같이 먹고 싶어서."
담담하게 던진 말에, 채령은 순간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이렇게 직설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그런 말,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틀린 말도 아닌데."
백결이 무심하게 답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채령은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얼굴만 붉혔다.
"그럼 이사님은, 학교 졸업하고 계속 이 회사 준비하신 거예요?"
채령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어느 정도는. 유학 갔다가, 몇 년 전에 들어왔어."
"…그럼 그때, 저 말고 다른 애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 안 나세요?"
"몇 명은. 근데 채령 씨만큼 정확하진 않아."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채령은 그 말속에 담긴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왜 유독 자신만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궁금해졌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백결이 문득 물었다.
"디자인 일,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거예요?"
"네. 오래전부터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잘 어울려. 그런 일."
짧은 칭찬이었지만, 채령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같은 시각, 회사 다른 층에서 하린의 메시지를 확인한 강태오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시작이네.'
그는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오래도록 지켜봐 온 친구의 마음이, 드디어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