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채령은 입사 첫날부터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디자인팀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고 밝았고, 책상 위에는 이미 그녀의 이름이 적힌
명패까지 놓여 있었다.
“채령아, 여기야 여기!”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대학 동기이자 이번에 같은 팀으로 배치된 백하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린아, 진짜 반갑다.
같은 팀일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나 어제 배치표 보고
완전 소리 지를 뻔했잖아.”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낯선 회사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것만으로도 채령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근데 채령아,
여기 회사 후계자가 누군지는 알아?” 하린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니, 아직 잘 몰라. 왜?”
“이따 오리엔테이션에서 직접 인사한대.
완전 능력자에, 얼굴도 장난 아니라던데.” 채령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재벌가 자제라는 말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낯선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게
더 급한 일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며, 채령은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 말수는 적었지만 늘 눈에 띄던 존재감. 그때는 그저 먼발치에서 몰래 훔쳐보는 게 전부였다.
이름도, 지금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른 채, 그 감정은 졸업과 함께 자연스럽게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왜 그 생각이 나지.’
채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떠올릴 이유도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은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신입사원들이 자리에 앉아 웅성거리는 사이, 문이 열리며 임원진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채령의 숨이 순간 멎었다. ‘…설마.’ 큰 키, 서늘한 눈매, 뚜렷한 이목구비. 세월이 흘러 분위기는 달라졌지만,
그 얼굴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늘 먼발치에서만 바라봤던 사람. 졸업 후 연락 한번 나누지 못하고
흩어졌던 그 이름. 백결이었다. 옆자리의 하린이 팔꿈치로 채령을 쿡 찔렀다.
“저 사람이야, 후계자. 잘생겼지?”
채령은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저 닮은 사람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봤지만,
저 얼굴을 착각할 리 없다는 확신이 동시에 밀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백결입니다.”
담담한 인사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신입사원들을 훑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 시선이 채령에게서 멈췄다.
찰나였지만, 채령은 분명히 느꼈다. 그의 눈빛에 스친 옅은 동요를. ‘…나를 알아본 건가?’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채령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설마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신입사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채령이 자료를 정리하던 사이, 낯익은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진채령 씨.”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정확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채령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백결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하린은 이미 다른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러 자리를 비운 뒤였다.
“……네?”
“오랜만이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채령의 눈이 커졌다.
“저를…… 기억하세요?”
“고등학교 2학년, 3반. 창가 자리.”
백결이 담담하게 답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정확한 기억이었다. 채령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그걸 어떻게.
저희 그때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본 적도 없는데.”
“그랬지.”
“근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백결은 잠시 침묵했다. 대답 대신, 그의 시선이 잠깐 다른 곳을 향했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여유로운 미소였다. 하지만 채령은 그 대답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단순히 기억력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묘하게 확신에 찬 태도였다.
“근데 왜 이 회사에…….”
“입사했어요, 저도.
오늘부터 디자인팀에.”
“알아. 명단 봤으니까.”
담담한 말투였지만, 채령은 그 말속에서 묘한 확신을 느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리고 그 사실이 싫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마 그것 때문에
저한테 지금 이렇게 말 거시는 거예요?” 채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안 되나.”
되묻는 말에, 채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태도는, 그녀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의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의 백결은 늘 거리를 두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기, 이사님.”
“백결이라고 불러도 돼. 회사 밖에서는.”
그가 말을 끊으며 답했다. 채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저 기억하고 계셨던 거예요?
계속?” 채령이 조심스레 물었다. 백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어. 계속.”
그 짧은 대답에, 채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저 스쳐 지나간 동창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확신에 차서 “계속” 기억했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나랑 무슨 접점이 있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반이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얽힌 기억도 없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했던 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채령은 애써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채령 씨.”
백결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걸음이었지만, 채령은 그 뒷모습에서 이상한 확신을 느꼈다.
이 재회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멍하니 서 있던 채령에게, 어느새 돌아온 하린이 다가왔다.
“야, 방금 뭐야?
후계자님이 왜 너한테 말을 걸어?”
“어…… 그게.”
채령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아는 사이야?”
“……고등학교 동창.”
“헐, 진짜?
그럼 이제 완전 편한 사이 아니야?” 하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채령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편하기는. 학교 다닐 때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도 없는걸.”
“근데 방금은 되게 친한 것처럼 보였는데.”
채령은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방금 전 그의 말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을 데우고 있었다.
같은 시각, 회의실 뒤편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백결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두었던 낡은 졸업앨범 사진 한 장으로 익혀둔 얼굴이었다. 대학 시절, 술에 취한 백결이
딱 한 번 흘리듯 꺼냈던 이름.
그날 이후로 태오는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저 사람, 어디서 봤는데.”
옆에 선 비서실 동료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마. 그냥 아는 사람이야.”
태오가 담담하게 답하며 시선을 거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백결이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십 년을 넘게 담아둔 마음이, 이제야 제대로 움직이려나 보네.’ 태오는 자리로 돌아가는 채령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았다. 저 사실을 채령이 아직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어쩐지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 회사가 꽤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