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며칠 뒤, 회사에서는 대규모 창립기념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룹 계열사 임원들과 주요 파트너사가 모두 참석하는, 일 년 중 가장 큰 공식 행사였다.
"이번 행사, 나도 참석해야 해서 좀 늦게까지 있을 것 같아."
백결이 채령에게 말했다.
"괜찮아. 나도 디자인팀 쪽에서 준비할 게 많아서 바쁠 것 같아."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의심 없이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유설과 제갈도진은 이미 치밀한 계획을 완성해두고 있었다. 행사 당일 오후, 채령은 팀장의 지시로 행사장 인근 자재 창고에 자료를 가지러 갔다. 평소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단순한 심부름이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채령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 짧은 틈에, 낯선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저항할 틈도 없이, 채령은 순식간에 창고 안쪽 어두운 공간으로 끌려갔다.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채령은 창고 구석의 좁은 방 안에 갇혀 있었다. 손목은 노끈으로 묶여 있었고, 문밖에서는 낯선 인기척이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야, 대체."
채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유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들어섰다.
"…유설 씨?"
"미안해요, 채령 씨.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상황이 여기까지 왔네요."
유설의 담담한 말에, 채령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명백한 범죄예요."
"알아요.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채령 씨가 오늘 하루만, 여기서 조용히 있어줬으면 해서."
"…무슨 소리예요."
"오늘, 결이랑 나 사이에 아주 중요한 자리가 생길 예정이거든요. 채령 씨가 없어야, 그게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 같아서."
유설의 말에, 채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채령이 소리쳤다. 유설은 그 반응에 잠시 표정이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여유로운 미소로 돌아왔다.
"걱정 마요. 나쁜 일은 안 할 거니까. 그냥, 사람들 눈에 우리 둘이 자연스러운 사이로 보이게만 하면 돼요."
"…그게 무슨."
채령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제발, 결이한테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채령의 다급한 애원에도, 유설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홀로 남은 채령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와 함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같은 시각, 행사장에서는 백결이 낯선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 이러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벽에 몸을 기댔다. 몇 분 전 마셨던 음료 한 잔이 문득 떠올랐다. 평소와 다른 씁쓸한 뒷맛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게 화근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스쳤지만, 몸은 이미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지나가던 직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잠시 쉬면 될 것 같아요."
백결은 애써 정신을 붙잡으며 근처 휴게실로 향했다. 걸음이 자꾸 휘청거렸지만,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미 그 안에는 유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설아, 네가 여긴 왜."
"결아,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유설이 걱정스러운 척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백결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이거, 설마 네가."
"쉿,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고 좀 쉬어. 곧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 거니까."
유설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백결은 저항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내려앉았다.
'…채령이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의 마지막 생각은 온통 채령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 달리, 몸은 이미 그의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그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사이, 유설은 미리 준비해둔 계획대로, 그를 소파에 눕히고 자신도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곧,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게 될 거야.'
그녀의 눈빛에는,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집착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한편, 창고에 갇힌 채령은 묶인 손목으로 애써 핸드폰을 찾았지만, 이미 빼앗긴 뒤였다. 문밖에서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좁은 방 안, 홀로 남겨진 채령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창고 한쪽에 낡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손이 묶인 채로는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몸을 비틀어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소리라도 내야 해.'
채령은 발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라도, 누군가 이 소리를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같은 시각, 행사장에서 백결을 찾던 강태오는 어딘가 불안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되는데.'
백결에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연락을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행사장 곳곳을 살피던 태오는, 문득 한쪽 복도 끝의 휴게실 앞에서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유설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수상함을 느낀 태오는 조용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휴게실 문틈 사이로, 소파에 나란히 누운 백결과 유설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게 대체 무슨.'
태오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굳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곧바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