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백결은 예정에 없던 시간에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았다. 회장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아들의 낯선 방문에 살짝 눈썹을 올렸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백결이 문을 닫고,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유설이와의 혼담, 이제 완전히 접어주셨으면 합니다."
담담하지만 확고한 어조였다. 회장은 잠시 아들을 바라보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얘기냐. 몇 번을 말했잖니, 그건 이제 와서 무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고."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제 입장은 늘 같았어요."
"…그래도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야. 두 집안 사이에 오간 얘기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알면서."
회장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에도, 백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얘기가 오래됐다는 게, 제가 원치 않는 결혼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안 됩니다. 저는 처음부터 확실히 거절 의사를 밝혀왔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그럼 유설이는 어떡하고. 그쪽 집안 체면도 있는데."
"그건 애초에 저희 두 사람 사이에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른들끼리 만든 얘기니, 정리도 어른들 선에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백결의 단호한 논리에, 회장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저 지금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계속 만날 생각입니다."
"…그 디자인팀 신입사원 말이냐?"
회장의 물음에, 백결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어요?"
"이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되겠니."
회장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 말에는 못마땅함보다는, 오히려 흥미로운 여운이 섞여 있었다.
"…그럼 반대하시는 겁니까?"
"반대는 안 했다. 근데 확인은 해야지. 네가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나오는 걸 보니, 어설픈 마음은 아닌 것 같구나."
회장의 대답에, 백결은 순간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럼."
"유설이 쪽 집안에는, 내가 직접 정리하마. 어차피 나도 마음 한 켠에는, 억지로 밀어붙일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거절해왔는데, 계속 끌고 가는 것도 못할 짓이지."
뜻밖의 순순한 반응에, 백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대신, 확실히 책임질 자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큰소리쳐 놓고 흔들리면, 그건 그 사람한테도 못할 짓이니까."
"…걱정 마세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백결의 확고한 대답에, 회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문제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유설과 제갈도진이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
"…준비는 다 됐어?"
유설이 낮게 물었다.
"어. 이번 주 안으로 진행할 거야."
제갈도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근데 이번엔 정확히 뭘 하려는 거야? 계속 말 안 해주네."
"디자인팀 신규 프로젝트, 우리 쪽이랑 공동으로 진행하잖아. 그 안에서, 채령 씨가 낸 아이디어를 살짝 문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거야."
제갈도진의 설명에, 유설의 눈이 반짝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 브랜드 시안이랑 비슷하다는 의혹을 슬쩍 흘릴 거야. 표절 의혹만큼 신뢰를 빠르게 무너뜨리는 것도 없거든."
"…근데 그거, 진짜 사실이야?"
유설의 물음에, 제갈도진은 옅게 웃었다.
"사실일 필요는 없어. 의혹만으로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진실보다 의심을 더 오래 기억하거든."
"…근데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때쯤이면 이미 늦었지. 첫인상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야."
그의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계획에, 유설은 잠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소문 정도야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그 이상의 일이었다. 누군가의 커리어와 명예를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확실하게 끝내고 싶다며. 어중간하게 해서는 저 여자, 절대 안 흔들려."
"…근데 이거, 만약 잘못되면 우리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유설이 걱정스레 물었다. 제갈도진은 그 물음에 잠시 침묵하다가, 여유롭게 웃었다.
"걱정 마. 흔적 안 남게 처리할 거니까. 그냥 지켜보기만 해."
제갈도진의 단호한 말에, 유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의 망설임을 애써 누르며, 그녀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해."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유설은 문득 자신이 지금 어디까지 와버린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뒤였다.
그날 저녁, 백결은 채령을 만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진짜? 아버님이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셨다고?"
채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생각보다 훨씬 쉽게 넘어갔어. 오히려 내가 더 놀랐어."
"그럼 이제 유설 씨 쪽 문제는 정리되는 거야?"
"적어도 혼담 얘기는 확실히 끝난 거지. 아버지가 직접 정리하신다고 하셨으니까."
백결의 밝은 표정에, 채령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근데 채령아."
백결이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왜?"
"그래도 조심해. 유설이가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 같지는 않아서."
"…나도 그건 좀 걱정되긴 해."
채령이 솔직하게 답했다. 유설과 제갈도진,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두 사람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 흔들리지 말자."
백결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응. 안 흔들려. 이제 우리, 제대로 시작한 사이잖아."
채령의 다짐에, 백결은 옅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다가올 폭풍을 예감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믿음만은 굳게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