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묵의 서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정갈했다. 이율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랜만에 의부와 마주하고 있었다. 서재 안에는 향 내음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고, 창밖으로는 겨울 초입의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근래 별채에 꽤 신경을 쓴다고 들었다."
강현묵의 첫마디에 이율은 순간 움찔했다. 그는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목숨을 걸고 저를 지킨 사람입니다. 그 정도 도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리라."
강현묵은 낮게 되뇌며 이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나무람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율아. 네가 잊었을까 저어되어 다시 묻는다. 우리가 이 혼사를 어찌하여 성사시켰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 아비가 어찌 죽었는지도."
이율의 낯빛이 순간 굳었다.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몰락하던 그날, 불타는 저택과 살수들의 그림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
그날 밤을 떠올릴 때마다 이율의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시렸다. 겨우 여섯 살이었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도망쳐야 했고, 결국 혼자 살아남았다. 그 후로 몇 해간 이름도 신분도 숨긴 채 떠돌다, 강현묵의 손에 거두어진 게 지금의 자신이었다.
"위가가 없었다면, 그날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강현묵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거웠다.
"위가의 가주가 그 재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너도 잘 알겠지. 백무진의 아비와 결탁해 없는 죄를 지어내고, 그 대가로 네 가문이 잃은 땅과 지위 절반을 차지했다. 나는 지금껏 그 위증의 증거를 찾아 헤맸다. 이 혼사는 그 증거를 위가 안에서 직접 캐내기 위함이다."
이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강현묵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러가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이율은 예를 갖추고 서재를 나섰다.
복도를 걷는 내내, 이율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혔다. 강현묵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위가의 가주가 그날의 위증으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 대가로 가문의 땅과 지위까지 가로챘다.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핏줄로 겨우 살아남은 게 자신이었다. 그 증거를 캐내기 위해 이 정략혼을 받아들였고, 처음엔 진심으로 서연을 이용하려 했었다.
혼례 첫날, 그녀에게 매몰차게 쏘아붙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수 집안의 딸에게 곁을 내주지 않겠다고, 그저 이 혼인을 복수의 도구로만 쓰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다짐은 대체 어디로 흩어져 버린 걸까. 그런데 지금, 자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원수의 딸이다.'
이율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아무리 몸을 던져 자신을 지켜냈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라온 집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라는 사실이.
그럼에도 우물가에서 마주쳤던 서연의 옅은 미소가, 팔뚝의 상처를 감싸 쥐던 그 담담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죄책감과 혼란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자신이, 정작 원수 집안의 딸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래선 안 돼.'
이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예전처럼 선을 그어야 했다. 정을 주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고, 그저 원수 집안의 딸로만 대해야 했다.
그날 이후 며칠간, 이율은 다시 서연을 향한 관심을 거두려 애썼다. 죽도, 약재도 더 이상 보내지 않았고, 마주쳐도 애써 시선을 피했다.
서연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 다시 예전처럼 냉랭해진 이율의 태도에,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부인, 요즘 왕야께서 좀 이상하십니다. 전처럼 다시 데면데면하게…."
몸종의 조심스러운 말에 서연은 옅게 웃어 보였다.
"원래 그러셨던 분이야. 잠시 착각한 내 쪽이 문제지."
말은 담담했지만, 서연은 손에 쥔 수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바늘을 놓지 못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우물가에서의 그 짧은 다정함이 자꾸만 마음에 남아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저 상처를 걱정해서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한편 이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애써 거리를 두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자꾸만 속삭였다.
'정말 그뿐일까. 정말 그녀가, 그저 원수의 딸일 뿐일까.'
어릴 적 헛간에서 자신을 숨겨주던 그 손길과, 목숨을 걸고 자신을 감싸던 오늘의 서연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이율은 그 낯선 감정의 정체를 애써 외면하며, 다시 한번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서, 이미 새어 든 마음까지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율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