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율은 조정 일을 마치고 예정보다 일찍 왕부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한가한 오후였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그의 눈에, 정자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해온과 유재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편안한 공기, 그리고 무언가에 웃음 짓는 해온의 얼굴. 이율은 순간 걸음을 멈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그때 그 아이가…."
유재하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해온도 따라 웃었다. 평소 왕부 안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화사한 웃음이었다. 이율의 가슴 한구석이 이유 모르게 답답해졌다. 최근 며칠, 죽과 약을 챙겨 보내며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던 자신의 노력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런 웃음은, 나에겐 보인 적 없는데.'
그날 저녁, 이율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얼굴로 별채를 찾았다.
"오늘 낮에, 유 무사와 무슨 얘기를 그리 재미있게 나눴나."
해온은 뜻밖의 물음에 당황했다.
"그저… 옛이야기를 좀 들었을 뿐입니다."
"옛이야기라."
이율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렇게 편하게 웃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나."
"왕야, 그런 뜻이 아니라…."
"됐다. 더 듣고 싶지 않군."
이율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해온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울함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대체 무엇이 그의 심기를 이토록 건드렸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며칠간 이율은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피해 다녔다. 죽도, 약재도 끊겼고, 마주쳐도 시선을 돌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서윤이 우연히 그 사정을 전해 듣고 이율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왕야, 요즘 부인께 다시 냉랭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율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한서윤은 그 반응만으로도 대략 짐작이 간다는 듯 옅게 웃었다.
"유 무사가 그날 나눈 이야기, 알고 보니 부인의 어릴 적 이야기를 캐묻던 것뿐이었다고 하더군요. 부인의 지난 과거에 관심이 있어서 이것저것 물었다던데."
이율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런 것이었나."
"예. 왕야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이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의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고작 그런 것에 이성을 잃고 그녀를 몰아붙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후회로 밀려왔다.
그날 밤, 이율은 다시 별채를 찾았다.
"…며칠 전엔, 내가 경솔했다."
해온은 뜻밖의 사과에 눈을 크게 떴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대를 몰아붙였다. 미안하다."
해온은 그 서툰 사과에 오히려 마음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이율이 이렇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왕야께서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이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곁에 앉았다. 서툴게나마 화해를 청하는 그 모습이, 해온에게는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그렇게 웃는 얼굴, 나에게도 좀 보여주면 안 되겠나."
이율이 나지막이 덧붙인 말에, 해온은 순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낯선 솔직함이었다. 그 말에 담긴 서투른 진심이, 해온의 마음 한구석을 조용히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