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생각보다 더디게 아물었다. 서연은 며칠째 별채에 머물며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지내야 했다. 처음 며칠은 답답한 마음에 잠도 설쳤지만, 시간이 지나며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인, 왕야께서 보내신 겁니다."
몸종이 조심스레 내미는 쟁반 위에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서연은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직접 보내신 거라고?"
"예. 의원이 상처엔 이런 음식이 좋다고 했다면서, 직접 주방에 일러두셨다 합니다."
서연은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지금껏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었던 사람이, 이런 세심한 것까지 챙길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로 비슷한 일이 며칠 반복됐다. 팔에 바를 약이 떨어지기 전에 새 약이 도착해 있었고, 날이 쌀쌀해지자 별채에 화로가 하나 더 들어왔다. 전부 몸종을 통해 조용히 전해지는 것들이었다. 정작 이율 본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저기, 저것도 왕야께서…?"
"예, 부인. 화로도 왕야께서 손수 챙기라 이르셨습니다."
서연은 창가에 놓인 낯선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정을 바라고 온 자리가 아니었는데, 이런 사소한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오후, 서연이 붕대를 갈기 위해 마당 우물가로 나섰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이율과 마주쳤다. 며칠 만의 직접적인 마주침이었다.
"…왕야."
서연이 놀라 예를 갖추려 하자, 이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팔은 좀 어떤가."
"많이 나았습니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서연이 말끝을 흐리며 감사를 전하려 하자, 이율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별것 아니다. 의원이 그리하라 했을 뿐."
"그래도 감사합니다. 화로도, 약도, 그리고 죽까지."
이율은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 못한 채 헛기침을 했다.
"…몸조리나 잘 하도록."
그는 그 짧은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서연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예전의 그 냉랭함과는 분명 결이 달랐다.
한편 이율은 서재에 틀어박혀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왕야, 오늘도 별채에 죽을 보내라 하셨습니까."
한서윤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 물음에 이율의 붓끝이 살짝 멈췄다.
"상처 회복엔 그게 낫다고 들었다."
"그렇군요. 지난 며칠간 화로에, 약재에, 죽까지 — 원수 가문 여식을 향한 배려치고는 꽤 각별하십니다."
한서윤의 말에는 은근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이율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쳤다.
"목숨을 걸고 나를 지킨 사람이다. 그 정도 도리는 해야지."
"…그렇습니까."
한서윤은 더 캐묻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이율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다시 붓을 움직였다.
사실 이율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수 집안의 딸을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정략혼의 목적은 복수였지, 다정함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서연이 다쳤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팔뚝에 그어진 붉은 상처가, 자신을 대신해 생긴 흉터라는 게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껏 누구를 위해서도 이런 식으로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수 집안의 딸에게, 이런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그날 저녁, 이율은 서재를 나서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별채 쪽으로 발길이 저절로 향하려는 걸, 그는 몇 번이고 억눌렀다.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오늘 낮, 자신의 감사 인사에 옅게 웃던 서연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 웃음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끌었다.
결국 그날 밤 이율은 별채 마당 어귀까지 걸음을 옮기고야 말았다. 창호지 너머로 은은한 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서연이 무사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이율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릴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먼발치에서 등불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원수 집안의 딸이라며 그어두었던 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흐릿해졌는지, 이율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낯선 다정함이 자신의 마음속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애써 외면해온 그 답을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율은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아직은, 자신의 이 낯선 마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별채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매화 가지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