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05화 · 전체 30

균열

글 · 힐링아무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후였다.

서연은 몸종 하나만 데리고 저잣거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왕부의 안주인으로서 명절 채비에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살펴보고 오라는 한서윤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임무는 아니었지만, 갑갑한 저택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시장통은 명절을 앞두고 한창 붐볐다. 서연은 필요한 비단과 향료를 고르며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몸종이 곁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흥정하는 동안, 서연은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사람들 틈에 섞여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돌아오는 길, 저택 근처 골목을 지날 무렵이었다. 서연은 담벼락 그늘에 몸을 숨긴 낯선 사내들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검은 무복 차림에, 얼굴을 가린 채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서연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담장 위쪽 그늘에서도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왕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긴… 위쪽에도.'

무공이라곤 배운 적 없는 서연이었지만,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누군가를 노려보는 그 눈빛만큼은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연은 담장 위 자객이 몸을 날리는 순간 이율을 향해 달려들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왕야!"

이율이 놀라 손을 뻗어 그녀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이미 자객의 검이 코앞까지 떨어져 내린 참이었다. 이율은 재빨리 서연을 감싸 안듯 몸을 틀며 검을 올려쳐, 자객의 검을 정확히 튕겨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검날 끝이 서연의 팔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서연이 비틀거렸다. 이율은 그녀를 한 팔로 붙든 채, 다른 손으로는 이미 정면에서 달려드는 나머지 자객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이율의 검술은 군더더기 없이 매서웠다. 한 손으로 서연을 지탱한 채임에도, 자객들은 몇 합을 겨루지도 못한 채 하나둘 물러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애초에 목적이 확실한 척살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습격이었던 듯했다.

자객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이율은 검을 거두고 팔에 안긴 서연을 내려다보았다.

"괜찮나."

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는 다른 다급함이 묻어났다. 서연은 팔을 감싸 쥔 채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저 스친 정도라…."

말과 달리 소맷자락이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율은 그 상처를 확인하고는 순간 낯빛이 굳었다.

"어째서."

"예?"

"어째서 몸을 던졌냐 묻는 거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면서."

서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 담담히 대답했다.

"그 순간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율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원수 집안의 딸이, 아무 계산도 없이 자신을 지키려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는 서연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말릴 틈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와, 왕야…!"

서연이 놀라 몸을 굳혔지만, 이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태로 걷게 할 순 없다."

"의원! 어서 의원을 불러라!"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이율이 크게 외쳤다. 하인들이 놀란 얼굴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지금껏 한 번도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낸 적 없던 왕야의 모습에, 하인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원이 도착해 상처를 살피는 동안, 이율은 방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서연의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의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며칠 약을 바르고 조심하시면 흉도 크게 남지 않을 겁니다."

의원의 말에 이율은 그제야 조금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방문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그날 밤, 서연의 처소를 나서던 이율은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의원이 다녀간 뒤였고, 상처는 깊지 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놓이지 않았다.

'왜 하필 나를.'

이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원수 가문의 딸이니, 오히려 이런 기회에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걸 내버려 두어도 그만이었을 텐데. 그러나 서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 담담한 얼굴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릴 적 헛간에서 자신을 숨겨주었던 그 아이의 얼굴과, 오늘 낮 자신을 감싸던 서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율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녀를 그저 원수 집안의 딸,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려 애써왔다. 곁을 내주지 않으면, 정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아왔다.

그런데 오늘, 그 담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서연이었다. 아무 계산 없이, 그저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그 말 한마디가 이율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설마, 정말로.'

이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원수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어두었던 선이, 오늘 그 팔뚝의 상처만큼이나 선명하게 금이 가고 있다는 것.

0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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