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04화 · 전체 30

옛 친구

글 · 힐링아무

며칠 뒤, 저택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별채까지 전해졌다.

"강씨 왕부에 새로 온 무사님이시래요. 유재하라고, 왕야와는 예전부터 인연이 있으시다던데."

몸종의 전언에 해온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부를 드나드는 손님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과는 어차피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 오후, 마당을 거닐던 해온의 앞에 낯선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저기…."

사내는 해온을 보자마자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굳어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자유분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실례지만."

해온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닮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요."

해온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저를 아십니까?"

"…글쎄요.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재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도 이 확신 없는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 닮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그 아이가 벌써 몇 해나 지난 지금, 이런 곳에서 마주칠 리는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는 유재하라고 합니다. 어릴 적 알던 사람과 얼굴이 워낙 닮으셔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서씨 가문'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확신도 없이 함부로 꺼낼 이름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위서연이라 합니다."

유재하의 눈빛에 순간 복잡한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그 이름을 곱씹듯 낮게 되뇌었다.

"…위서연."

말을 마친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자세를 바로 하며 예를 갖췄다.

"왕부에 새로 몸을 의탁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종종 마주치게 될 겁니다."

"예, 그러시군요."

해온의 담담한 대답에, 유재하는 옅게 고개를 숙였다.

"…예, 부인."

유재하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한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짧은 대화였지만, 유재하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그 애틋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은 사람의 눈빛 같았다.

그때, 마당 저편에서 왕야가 무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율은 해온과 나란히 서 있는 유재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얘기를 그리 나누나."

이율의 목소리엔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유재하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 나눈 것뿐입니다. 왕부에 새로 온 사람이니 부인께도 예를 갖춰야지요."

이율은 그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시선을 돌렸다.

"용무 끝났으면 이만 물러가지."

해온을 향한 그 짧은 한마디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해온은 두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재하의 눈빛이 살짝 굳었다.

"너무 매몰차게 구시는 거 아닙니까."

유재하가 낮게 던진 말에, 이율은 그를 힐끗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유재하는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방금 본 이율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날 저녁, 유재하는 왕부의 무사들이 머무는 처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낮에 마주쳤던 여인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저 닮은 것뿐일까.'

어릴 적, 서은월 대부인의 저택에서 함께 뛰어놀던 소꿉친구가 떠올랐다. 서은월의 손녀이자, 유재하에게는 누이 같기도, 첫정 같기도 했던 아이. 어린 시절 해온은 유재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야무지고 씩씩해서, 늘 유재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지지 않고 제 할 말은 다 하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은월 대부인은 몇 해에 걸쳐 사람을 풀어 백방으로 손녀를 찾았지만 끝내 종적을 찾지 못했다. 유재하 역시 나이가 든 뒤로도 틈틈이 그 실종의 흔적을 좇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희망은 옅어져 갔다.

그런데 오늘 마주친 위서연이라는 여인의 눈매와 몸짓 하나하나가, 자꾸만 그 옛 기억과 겹쳐 보였다.

'설마.'

유재하는 씁쓸하게 잔을 비웠다. 원수 가문인 위가의 딸이라는 것도, 벌써 몇 해나 지났다는 것도 —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우연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낮에 마주쳤던 이율의 태도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원수 집안의 딸이라 홀대하는 것치고는, 그 눈빛에 스치던 감정이 단순한 냉대만은 아닌 듯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유재하는 조용히 다짐했다. 섣불리 서은월 대부인에게 알렸다가 헛짚은 것이라면 괜한 기대만 안겨줄 뿐이었다.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며, 확신이 설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만에 하나 정말 그 아이가 맞다면, 이번엔 예전처럼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유재하는 빈 잔을 다시 채우며, 창밖의 어둠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0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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