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03화 · 전체 30

저택의 벽

글 · 힐링아무

별채에서의 하루는 단조롭게 흘러갔다. 해온은 아침이면 홀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몸종이 가져다주는 조촐한 아침상을 받았다. 딱히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낮 시간의 대부분은 방 안에서 수를 놓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다.

가끔 저택 마당을 산책하다 보면, 하인들이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저 부인, 왕야께서 아예 상대도 안 하신다며?"

"그럴 만도 하지. 원수 집안 딸인데 오죽하겠어."

"그래도 얼굴은 참 곱던데. 시집와서 저리 홀대받는 것도 딱하지."

해온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이런 시선은 위가에 있을 때부터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이곳에서는 대놓고 무시라도 하니, 뒤에서 은근히 배척당하던 예전보다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마당 한켠, 오래된 매화나무 아래에 이르자 해온은 걸음을 멈췄다. 아직 꽃이 필 계절은 아니었지만, 앙상한 가지만 보아도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어릴 적부터 매화나무를 보면 늘 그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마음 깊은 곳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위가의 넓은 저택 안에서, 해온의 방은 늘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겨울이면 유난히 웃풍이 심해 이불 속에서 떨며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반면 아린의 방은 늘 볕이 잘 드는 안채 옆에 자리했다. 어린 아린이 새 비단옷을 입고 마당을 뛰어다니면, 위가의 안주인은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해온이 같은 마당에서 그 모습을 바라볼 때면, 안주인의 시선은 늘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언니는 이런 것도 못 하면서 왜 밥은 똑같이 먹어?"

어린 아린이 곧잘 던지던 말이었다. 그 말에 담긴 날카로움을 그때는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무언가 부족해서 그런 말을 듣는 거라고, 더 잘하면 언젠가 달라질 거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유독 잊히지 않는 겨울밤이 있었다. 그해 겨울, 해온은 심한 고뿔로 며칠을 앓아누웠다. 그런데도 위가의 안주인은 해온에게 마당의 빨래를 마저 끝내라 명했다. 살얼음이 낀 우물물에 손을 담그며 밤늦도록 빨래를 헹구던 그날, 열이 오른 몸으로 덜덜 떨면서도 해온은 그저 이 일을 마치면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같은 시각, 아린은 고작 코감기 정도로 자리보전을 하며 의원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따뜻한 화로 곁에서 탕약을 받아 마시는 아린의 모습이, 마당의 우물가에서 흘끗 보였다. 해온은 그 광경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손끝의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빨래를 헹궈야 했다.

그날 밤, 결국 해온은 고열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몸종 하나가 몰래 약을 구해다 준 덕에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서 해온은 남들보다 갑절은 더 애썼다. 바느질도, 예법도, 살림도 흠잡을 데 없이 해내려 했다. 명절이면 손끝이 부르트도록 음식을 장만했고, 어른들 앞에서는 늘 흠 하나 없는 예를 갖추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돌아오는 건 무심한 시선뿐이었다. 해온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자라왔다.

'그래도 상관없어.'

해온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사는 곳이 바뀌었을 뿐, 자신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버텨내는 삶은 늘 같았다.

별채로 돌아온 해온은 창가에 앉아 수틀을 꺼냈다. 딱히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었지만,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잡생각이 덜해졌다. 그때,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아닌, 좀 더 무거운 걸음이었다. 해온이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며 왕야가 들어섰다.

뜻밖의 방문에 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를 갖췄다. 별채에 발을 들인 건 혼례 첫날 이후 처음이었다.

"왕야, 어인 일이십니까."

이율은 방 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단출한 세간, 정갈하게 정돈된 이부자리, 창가에 놓인 작은 화병까지 — 그 무심한 시선이 방 구석구석을 훑는 동안, 해온은 괜히 긴장한 채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서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나."

해온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예상 밖의 물음이었다. 며칠 전 마당에서 매몰차게 선을 그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없습니다."

"그래."

이율은 그 짧은 대답만 남기고 방을 둘러보던 시선을 거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해온은 이 뜻밖의 방문이 무엇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수틀 위에 놓인 자수에 눈길이 멈췄다. 흔한 문양이 아니라, 어딘가 낯익은 매화 무늬였다.

"이건…."

이율이 낮게 중얼거렸다. 해온은 그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며 대꾸했다.

"어릴 적부터 이 무늬만 손에 익어서요. 딱히 배운 것도 아닌데, 눈을 감고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에 이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돌아섰다.

"필요한 게 있으면 몸종에게 이르라."

그 말을 끝으로 이율은 방을 나섰다. 해온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에 스쳤던 동요를 분명히 보았다. 자수의 무늬 하나에 왜 그렇게까지 흔들렸는지, 해온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이율은 홀로 서재에 앉아 오래된 목함을 꺼냈다. 그 안에는 빛바랜 천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릴 적, 위기에서 자신을 숨겨주었던 그 아이가 손수 지어주었던 물건이었다.

천 조각 위에 새겨진 매화 무늬는, 낮에 본 자수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이율은 그 아이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흐릿한 잔상 하나 — 자신을 헛간 구석에 밀어 넣고, 작은 손으로 문틈을 막아주던 아이의 뒷모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마주치지 못했던 그 아이가, 설마 지금 이 저택 별채에 있을 리는 없었다.

'설마.'

이율은 목함을 다시 닫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동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원수 집안의 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설령 그 아이와 닮은 무언가가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율은 밤늦도록 그 낡은 목함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0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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