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02화 · 전체 30

냉대

글 · 힐링아무

혼례를 치른 지 열흘이 지났지만, 해온은 아직 이율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율이 그럴 기회를 아예 주지 않았다.

"왕야는 오늘도 밖에서 아침을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몸종이 조심스레 전하는 말에 해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통보였다. 이율은 새벽같이 저택을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왔고, 그마저도 안채 깊숙이 틀어박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이 저택 안에 해온이라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해온은 그런 나날에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위가에 있을 때도 늘 그래왔으니까.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은, 그녀에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율과 마주친 건 사흘 전, 저택 마당에서였다. 해온이 산책을 나섰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이율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해온이 먼저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한마디뿐이었다.

"불편하게 그런 인사, 안 해도 돼."

"…네."

"그리고 이 마당은 내가 주로 지나다니는 길이니까, 앞으로는 다른 쪽으로 다녀."

해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겨우 그 정도 마주치는 것조차 성가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왕부의 안주인 행세는 할 필요 없다. 그저 이름만 걸쳐 있을 뿐, 이 집안일에 함부로 나서지 마라."

이율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뚝뚝 묻어났다. 해온은 그 말이 가슴 한쪽에 깊이 박히는 걸 느꼈다. 안주인이라는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율은 그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이내 자리를 떠났다. 해온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위가에서도, 이곳에서도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늘 남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이었다.

이튿날, 이율은 왕부의 집사와 하인들을 모아놓고 짧게 지시를 내렸다.

"별채의 부인은 그저 이 댁에 몸을 의탁한 정도로만 대하면 된다. 안주인이라 하여 특별히 예우할 것 없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챙겨드리면 된다."

그 말은 순식간에 왕부 전체에 퍼졌다. 그날부터 해온에게 오는 음식의 가짓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별채를 드나들던 몸종의 수도 하나로 줄었다. 심지어 몇몇 하인들은 대놓고 그녀를 향한 예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부인, 오늘 드실 저녁상입니다."

평소보다 훨씬 조촐해진 상을 앞에 두고, 해온은 잠시 말을 잃었다. 왕부의 안주인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상차림이었다. 몸종도 그 사실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왕야께서 그리 이르셨나."

"예, 부인. 죄송합니다."

해온은 고개를 저으며 짧게 답했다.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수저를 드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해온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갔다. 이런 대우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위가에서 겪어온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오히려 익숙한 축에 속했다. 다만 오늘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부인, 오늘은 큰어른들께서 오찬을 여신다고 합니다. 왕야도 참석하시니, 부인께서도 자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몸종의 말에 해온은 잠시 손을 멈췄다. 강현묵과 마주하는 건 혼례 이후 처음이었다.

오찬 자리는 예상보다 더 냉랭했다.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해온의 자리는 이율의 옆이었지만 정작 이율은 그녀 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강현묵은 온화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해온을 향한 말은 형식적인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다.

"며늘아기도 이제 이 집에 적응할 때가 됐겠구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온의 예를 갖춘 대답에, 강현묵은 짧게 웃어 보일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옆에서 한서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해온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해온이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원탁 반대편에는 남가온이 앉아 있었다. 세련된 자태로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던 그녀의 시선이, 이따금 해온과 이율 쪽을 스치듯 지나갔다. 겉으로는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 속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

"왕야, 오랜만이에요."

남가온이 이율을 향해 가볍게 말을 건넸다. 이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무심한 태도에도 남가온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옅게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끝에 스치는 감정을 해온은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었다.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였다.

오찬이 끝나갈 무렵, 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이율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율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서, 해온은 낮에 느꼈던 것과 같은 위화감을 다시 느꼈다. 서늘하고 냉랭한 겉모습 아래, 무언가 다른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이율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가 짧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자, 해온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왕야."

이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온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 말고, 한 번쯤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율은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용건 없으면 부르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해온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채로 돌아오는 길, 몸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인, 아까 그… 남가온 아씨 말인데요. 원래 왕야와 정혼 얘기가 오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해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대꾸했다.

"그런 얘긴 몰라도 돼."

몸종은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는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해온은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방금 들은 이야기가 묘하게 마음 한구석에 얹혔다. 그것이 질투인지, 아니면 그저 낯선 자리에 대한 불안함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별채로 돌아온 해온은 창가에 앉아 낮의 일을 곱씹었다. 이율의 차가운 태도는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유난히 서늘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해온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되뇌었다. 애초에 정을 바라고 온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낮에 마주쳤던 그 짧은 눈빛만이, 자꾸만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그 시각, 이율은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에 쥔 붓끝이 좀처럼 종이 위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용건 없으면 부르지 마라니.'

스스로 뱉은 말이었지만,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해온의 담담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원수 집안의 딸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스스로도 낯설고 불편했다.

이율은 붓을 내려놓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던 그 낯익은 위화감이, 오늘도 여전히 그의 마음 한구석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낮에 마당에서 그녀에게 쏘아붙였던 말들이 문득 떠올랐다. 필요 이상으로 매몰차게 굴었다는 걸, 그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율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02화 끝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