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가 조정에 받아들여진 지 사흘 뒤, 위가는 완전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위가의 가주는 하옥된 채 조사를 받았고, 그 죄상이 조정 안팎에 낱낱이 퍼졌다.
백무진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아버지 대의 결탁 사실이 함께 드러나며, 조정 안팎에서 그를 향한 시선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지금껏 쌓아온 권세가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백무진은, 이제 조정 안에서는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결국 국경 너머 흑랑족과 은밀히 접선했다. 오래전부터 변경을 넘보던 세력이었다.
"국경 방비의 허점을 알려드리지요. 대신 제가 원하는 걸 들어주셔야 합니다."
백무진은 흑랑족의 사신에게 강씨 왕부가 지키는 국경 요충지의 허점과 병력 배치도를 넘겼다. 그 대가로 얻어낸 건 정예 기병 한 무리. 목적은 하나, 이율을 제거하고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을 되찾는 것이었다.
같은 날 밤, 백무진의 사주를 받은 흑랑족 무리가 왕부 인근에서 해온을 다시 납치했다.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아예 국경 너머로 끌고 갈 심산이었다.
"부인을 국경까지 데려가라. 이율이 반드시 쫓아올 것이다."
백무진의 명에 따라, 해온을 태운 무리는 밤을 틈타 북쪽 국경으로 향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강씨 왕부에 전해졌다.
"흑랑족과 결탁이라니…."
한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는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명백한 반역이자, 국경 안보를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차유진, 즉시 국경 수비대에 파발을 띄워라. 나는 지금 바로 뒤쫓겠다."
이율은 지체 없이 정예 무사들을 이끌고 말을 몰았다. 밤새 국경을 향해 달리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해온의 안위뿐이었다. 국경 부근 협곡에서, 이율의 부대는 마침내 흑랑족 무리를 따라잡았다. 해온을 태운 마차를 에워싼 채, 백무진이 그 곁에 서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군."
백무진이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벼랑 끝에 몰린 자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이 지경까지 왔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흑랑족과 결탁하다니 — 이건 복수를 넘어선 반역이다."
이율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반역이든 뭐든, 이제 나에게 잃을 게 뭐가 남았다고 생각하나. 이판사판이지."
백무진이 검을 뽑아 들며 신호를 보내자, 매복해 있던 흑랑족 기병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부인은 내가 지킨다! 너희는 적을 막아라!"
이율이 외치며 마차 쪽으로 몸을 날렸다. 흑랑족 병사 둘이 앞을 막아섰지만, 이율의 검이 순식간에 그들을 베어 넘겼다. 마차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손발이 묶인 채 두려움에 떨던 해온의 모습이 보였다.
"왕야!"
"괜찮다. 내가 왔다."
이율은 재빨리 그녀의 결박을 풀어주며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백무진이 검을 세우고 달려들고 있었다. 이율은 해온을 마차 구석으로 밀어놓고, 몸을 돌려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네놈 때문에, 내 모든 걸 잃었다!"
백무진이 광기 어린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율은 그 일격을 침착하게 받아넘기며 반격했다.
"네 아비의 죄, 그리고 네 스스로 쌓은 죄가 널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남 탓할 처지가 아니야."
두 사람의 검이 몇 차례 더 부딪쳤다. 이율의 검술은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해온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검에 더욱 매서운 힘을 실었다. 결국 이율의 검이 백무진의 검을 정확히 쳐올렸다.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가고, 백무진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무렵, 이율을 뒤따라온 국경 수비대가 도착해 남은 흑랑족 병사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협곡의 격전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이 났다.
"…끝났군."
백무진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이율은 검을 겨눈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목숨을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외적과 결탁해 국경을 팔아넘긴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으니."
백무진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게 결국 내 끝이었나."
이율은 그를 결박해 국경 수비대에 넘겼다. 반역죄는 조정의 몫이었다.
며칠 뒤, 백무진은 반역죄로 조정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위가 역시 그 가산을 몰수당하고 완전히 몰락했다.
두 가문 사이에 얽혀 있던 오랜 원한이, 그리고 국경을 뒤흔들 뻔했던 위기가, 마침내 그렇게 매듭지어졌다. 강씨 왕부로 돌아온 이율은 해온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정말로, 끝났다."
해온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두 사람을 옭아매던 원한과 비밀이 모두 걷히고, 이제 온전히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강현묵도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오랜만에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죽은 벗의 원한을 마침내 풀어준 셈이었다. 왕부 전체에 오랜만에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