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에서 물러난 뒤, 백무진은 자신의 거처에서 홀로 상처를 싸매고 있었다. 검에 베인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상처보다, 그날의 굴욕이 훨씬 깊이 그의 자존심을 후벼팠다. 의원이 다녀간 뒤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홀로 이를 갈았다.
"고작 이런 식으로 물러나야 한다니."
그는 낮게 이를 갈았다. 지금껏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율 앞에서, 그것도 그 여인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무력하게 밀려난 건 처음이었다.
'가질 수 없다면.'
백무진의 눈빛이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치적 계산이었고, 그다음엔 소유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오직 파괴하고 싶다는 충동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율에게, 그리고 그 여인에게 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 것 같은 굴욕감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저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이율의 손에서도 빼앗아 부숴버리겠다.'
그는 밤새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위험한 생각들을 굴렸다. 남은 세력을 총동원해 강씨 왕부를 직접 치는 방안, 혹은 해온을 다시 납치해 아예 먼 곳으로 빼돌리는 방안까지 —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계획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진지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심복 몇을 불러 은밀히 사람을 풀 준비까지 지시했을 정도로, 그의 집착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튿날, 남가온이 그의 거처를 찾았다. 그녀 역시 그날의 실패로 입지가 크게 흔들린 상태였다. 방 안 가득한 술 냄새와 흐트러진 백무진의 몰골에,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공자님, 이제 그만 물러서야 할 때 아닙니까."
남가온의 조심스러운 만류에, 백무진은 낮게 웃었다.
"물러서다니. 나는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않았어."
"이러다간 공자님의 가문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미 조정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가문 따위, 이미 위태로운 지 오래요."
백무진의 눈빛에 서린 광기에, 남가온은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함께해온 그가, 더 이상 예전의 냉철하고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손을 잡았던 건 치밀한 정치적 야심가였지, 이런 이성을 잃은 자가 아니었다.
"저는… 이만 발을 빼겠습니다."
남가온이 조심스레 물러나려 하자, 백무진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나에게 필요한 건 이제 그대의 힘이 아니니."
남가온은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 서늘한 시선에,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자와 손을 잡았었는지 깨달았다. 홀로 남은 백무진은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이대로 끝나진 않을 테니."
그의 눈빛에는 이제 그 어떤 계산도,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뒤틀린 집착과 파멸을 향한 충동만이 그를 이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파멸의 그림자는,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향해 가장 먼저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