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남은 자객들은 왕부 무사들에게 이미 제압당한 뒤였고, 이제 남은 건 백무진뿐이었다. 사방이 어지럽던 소란도 차츰 잦아들고, 폐가 안뜰에는 팽팽한 긴장만이 감돌았다.
"이 정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나?"
백무진이 해온을 붙든 팔에 힘을 주며 뒷걸음질 쳤다. 이율은 그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섣불리 다가섰다간 해온이 다칠 수 있었다.
"그 손, 지금 당장 놓아라."
이율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낮게 깔렸다.
"놓으면, 그대는 나를 벨 텐데."
"놓지 않아도 벨 것이다."
이율의 눈빛에 서린 살기에, 백무진은 순간 움찔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온이 온 힘을 다해 백무진의 팔을 뿌리치며 몸을 던졌다.
"부인!"
이율이 재빨리 달려들어 해온을 품에 받아 안았다. 동시에 그 틈을 노려 백무진에게 검을 휘둘렀다. 백무진은 가까스로 몸을 피했지만, 옷자락이 길게 베이며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백무진이 낭패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다음엔 이리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몸을 피했다. 왕부 무사들이 뒤쫓으려 했지만, 이율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쫓지 마라. 지금은 부인이 먼저다."
무사들이 물러나자, 이율은 품 안의 해온을 살폈다. 놀란 기색은 역력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만 손목에 결박당했던 자국과,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 핏기 없는 낯빛이 이율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괜찮은가."
"…예. 왕야 덕분에."
해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율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좀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해온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이율은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맹세코."
폐가를 벗어나 왕부로 돌아가는 길, 이율은 해온을 품에 안은 채 놓지 않았다. 말없이 걷는 그 길 위에서, 달빛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율은 마침내 마음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였다. 그대의 출생도, 내 마음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어 계속 주저했다. 하지만 오늘, 그대를 잃을 뻔한 순간 깨달았다."
해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연모한다. 원수 집안의 딸이든, 명문가의 손녀든 —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대이기에, 지키고 싶다."
해온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닌, 벅찬 감정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왕야를 뵐 때마다 흔들리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는 압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그동안 쌓아온 오해와 두려움을 뒤로하고 진심을 확인했다. 밤하늘의 달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은은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율은 손을 뻗어 해온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해온은 순간 숨을 멈췄다가, 이내 눈을 감으며 그 입맞춤에 응했다. 오랜 오해와 두려움 끝에 마침내 닿은 서로의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온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입맞춤을 끝낸 이율이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도 그대를 나에게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해온은 그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오랜 세월 홀로 버텨온 마음이, 처음으로 온전히 기댈 곳을 찾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