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진은 은밀히 서신 하나를 왕부로 보냈다. 부인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다면, 왕야 홀로 성 밖 폐가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무사도, 하인도 대동하지 말라는 단서까지 달려 있었다.
이율은 그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손끝이 떨리는 걸 억눌러야 했다. 해온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서신을 다 읽자마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한서윤이 다급히 만류했다.
"이건 명백한 함정입니다. 부인을 미끼로 왕야를 노리는 겁니다."
"알고 있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이율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서윤은 잠시 이율을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그럼 최소한 저희가 뒤를 밟게 해주십시오. 거리를 두고 따르겠습니다."
이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폐가에서는 백무진이 여유롭게 해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곧 그대의 낭군이 이곳으로 올 거야."
"…무슨 짓을 꾸미신 겁니까."
"별거 아니오. 그저 그자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조정에는 몰락한 가문 주제에 명문 서씨의 핏줄을 아내로 들여놓고, 그 출생의 비밀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 살수까지 동원해 입을 막으려 했다는 소문이 함께 퍼질 뿐이지."
해온의 낯빛이 굳었다. 백무진은 이미 이 상황을 이용해 이율의 정치적 입지까지 흔들 계획을 세워둔 것이었다. 감금은 그저 미끼였을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런 비열한 짓을…."
"비열하다니. 나는 그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지."
해온은 그 뻔뻔함에 말문이 막혔다. 이 자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남의 인생 하나쯤 짓밟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때, 폐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율이 도착한 것이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이율의 눈에, 해온을 붙든 채 여유롭게 서 있는 백무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숨어 있던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완전한 함정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백무진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그대가 나를 상대로 칼을 뽑는 순간, 조정에는 왕야가 죄 없는 사람을 습격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오. 물론 그대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부인은 내 손에 남게 되겠지."
진퇴양난이었다. 이율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가늠했다. 이대로 검을 뽑으면 정치적 명분을 잃고, 물러서면 해온을 잃는다 — 백무진이 노린 건 바로 이 이중의 덫이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둘 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 순간, 폐가 지붕 위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들어 자객 하나를 꿰뚫었다. 뒤이어 한서윤과 왕부 무사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거리를 두고 따르라 하지 않았느냐."
이율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가 홀로 오겠다고 한 건, 백무진을 방심시키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었다. 한서윤과는 미리 눈짓 하나로 뜻을 맞춰둔 터였다.
백무진의 낯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고 있었다. 남아 있던 자객들도 왕부 무사들의 기세에 밀려 하나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해온을 붙든 채 뒷걸음질 쳤다.
"이런 식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
"이미 늦었다."
이율이 검을 뽑아 들며 성큼 다가섰다. 해온을 향한 그의 시선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한서윤이 이미 사람을 풀어 조정에 오늘 일의 진상을 낱낱이 알릴 준비를 마쳐두었다는 것도, 이율은 알고 있었다. 백무진이 노린 정치적 함정은, 오히려 그 자신의 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과로 되돌아갈 참이었다.
해온은 이율의 굳건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려움 속에서도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