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온의 출생에 관한 소식은 오래지 않아 백무진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실과 연이 닿는 명문 귀족가의 숨겨진 핏줄이자, 서씨 가문의 적통 손녀.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백무진의 낯빛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거 참, 재미있게 됐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 안에는 짙은 조바심이 배어 있었다. 지금껏 해온을 그저 위가의 딸이자, 왕야의 부인 자리에 앉은 도도한 여인 정도로만 여겨왔다. 위가야 오래전부터 아버지 대의 뜻대로 움직여온 집안이니, 눈엣가시로 여길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명문 서씨 가문의 손녀이자, 강씨 왕부의 안주인. 그녀의 신분이 겹겹이 견고해질수록, 백무진이 그녀에게 손을 뻗을 명분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서씨 가문은 황실과도 연이 닿는 명문가였다. 이제 해온의 뒤에는 왕부뿐 아니라 그 가문의 힘까지 더해진 셈이었다.
'이대로 두면, 완전히 놓치겠구나.'
백무진은 조급해졌다. 지금껏 유지해온 여유로운 태도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결국 남가온을 불러들여 마지막 패를 논의했다.
"이번엔 확실하게 움직여야겠습니다."
"무슨 계획이십니까."
"부인을 잠시 데려와야겠습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남가온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닙니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백무진의 눈빛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서늘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며칠 뒤, 해온은 서은월을 뵈러 가는 길에 낯선 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호위 무사들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복면을 쓴 자들이 마차를 에워쌌다.
"부인을 모셔가라는 명이다!"
호위 무사들이 맞서 싸웠지만, 상대는 수적으로도 실력으로도 만만치 않았다. 해온은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자루에 씌워진 채 어딘가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해온은 낯선 별원의 한 방에 갇혀 있었다. 문밖에는 인기척이 없었지만, 굳게 걸린 자물쇠 소리만이 상황을 짐작게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백무진이 들어섰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해온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백무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대를 이대로 왕부에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이제 그대의 진짜 신분까지 밝혀졌으니, 더는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지."
"당장 저를 풀어주십시오. 왕야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바로 그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지."
백무진은 낮게 웃었다.
"이율이 얼마나 다급해질지, 그게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그자가 그대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그대와 조용히 이야기나 나누고 있으면 될 일이니까."
"저는 절대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해온이 단호히 쏘아붙였다. 백무진은 그 저항조차 즐긴다는 듯 옅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눈빛,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 그러니 더더욱 놓아줄 수가 없지."
해온은 그 말에서 이 모든 상황의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집착뿐 아니라, 이율을 향한 뒤틀린 승부욕까지 뒤섞여 있다는 것을. 그 시각, 왕부에서는 해온의 실종 소식에 이율이 이성을 잃을 듯 분노하고 있었다.
"당장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아라!"
이율의 명령이 왕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습격 현장에서 발견된 흔적들, 쓰러진 호위 무사들의 상처 하나하나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왕야, 진정하십시오. 흥분할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집니다."
한서윤의 만류에도 이율의 눈빛은 가라앉지 않았다. 차유진이 서둘러 정보를 그러모으는 사이, 이율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백무진.'
이율은 검을 챙겨 들며 낮게 되뇌었다.
"이번엔 반드시 끝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