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는 왕부에 도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서은월 대부인에게 달려갔다. 몇 해 전부터 조금씩 쌓아온 확신이,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은월은 오랜만에 찾아온 유재하를 반기다가도, 그 심각한 얼굴에 이내 낯빛을 고쳤다.
"무슨 일이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해온 아씨를… 찾은 것 같습니다."
서은월의 손끝이 떨렸다. 몇 해나 애타게 찾아온 이름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유재하는 그간의 정황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강씨 왕부의 부인이 된 위서연이라는 여인, 유괴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언과 서찰,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만이 가진 습관과 몸짓까지.
"확실한 것이냐."
"저 혼자만의 확신이었다면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씨 왕부에서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은월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직접 가서 봐야겠다."
강씨 왕부에 도착한 서은월을 맞은 건 이율이었다. 그는 예를 갖추며 서은월을 안으로 청했다. 오랜 여정에도 서은월의 발걸음은 조급했다.
"대부인, 이렇게 걸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손녀가 이 댁에 있다고 들었네. 지금 어디 있는가."
서은월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의 그리움과 조심스러운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이율은 그녀를 서연의 처소로 안내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부디 놀라지 않게 대해주십시오."
서은월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낯선 노부인의 방문에 예를 갖춰 인사했다.
"위서연이라 합니다."
서은월은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러 많이 자랐지만, 그 눈매와 이목구비 곳곳에 남은 흔적만은 분명했다. 특히 살짝 처진 눈꼬리와, 말할 때 무의식중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까지 — 어릴 적 그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 보였다.
"…해온아."
서은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서연은 순간 멈칫했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어딘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울림이 있었다.
"그… 이름이."
"네 진짜 이름이다. 서해온. 내가 네 할미다."
서은월은 품에서 오래된 옥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서씨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정표였다.
"이걸 봐다오.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직접 채워준 것이다."
해온은 떨리는 손으로 그 옥패를 받아 들었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무게감이었다. 옥패 뒷면에 새겨진 작은 매화 문양을 보는 순간, 해온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인지, 이 문양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괜찮다. 기억나지 않아도 된다. 이제라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그걸로 되었다."
서은월은 해온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오랜 세월 애타게 찾아 헤맨 손녀를 마침내 품에 안는 순간이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미안하다. 진작 찾아냈어야 했는데."
서은월의 목소리에 회한이 짙게 묻어났다. 해온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님 잘못이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 세월 서로를 향해 쌓여온 그리움과 서러움이, 이 짧은 만남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고 있었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구나.'
이율은 속으로 되뇌었다. 해온 앞에 놓인 새로운 진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뒤흔들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