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위가의 안뜰에는 이미 혼례 준비로 분주한 발걸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해온은 방구석에 놓인 낡은 경대 앞에 앉아,
몸종이 서툰 손길로 화장을 매만지는 걸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유난히 고우세요."
몸종의 인사치레에도 해온은 옅게 웃어 보일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아린의 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왔다.
동생은 오늘 언니의 혼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새로 들어온 비단 옷감을 두고 몸종들과 한참을 떠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해온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열여덟 해 동안 이 집에서 자신은 늘 그런 존재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애써도
부모라 불러야 할 이들의 눈빛에는 정이라곤 없었고, 그나마 곱게 자란 얼굴 덕에 이번 정략혼의 패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문의 어른들은 해온을 앞에 앉혀두고 딱 한 번,
그것도 사무적인 어조로 통보했었다. 이율 가문과의 오랜 악연을 매듭짓기 위해 그녀를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것. 해온의 의사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문득 혼담이 오가던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정략혼 이야기가 한창 오가던 어느 날, 위가에 귀한 손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린이 대인께 선물 받은 백자 화병을 만지작거리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화병이 산산조각 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 순간, 아린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급히 손가락으로 해온을 가리켰다.
"언니가… 언니가 저를 밀치는 바람에…."
"제가 그런 적 없습니다."
해온이 억울함에 항변했지만, 이미 위가의 안주인은 매서운 눈으로 해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손님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느냐!
동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이런 소란까지 일으키다니."
"어머니, 저는 정말…."
"닥쳐라!
이런 버릇없는 아이를 어느 안목으로 시집보낸단 말이냐." 해온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님들의 수군거림과 싸늘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변명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했던 그날의 굴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이런 일이 늘 이랬지.'
해온은 씁쓸하게 그 기억을 떨쳐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만큼은 그런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저 조용히 바랄 뿐이었다.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몸종의 마지막 손질이 끝나고, 해온은 경대 속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혼례복을 입은 낯선 여인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붉은 비단이 저택 담장을 타고 늘어져 있었다. 대문 앞에는 청사초롱이 줄지어 걸렸고, 하인들은 분주히 오가며
마지막 손님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혼례였다. 서해온은 그 화려함 한가운데서, 정작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한 채
가마에 앉아 있었다.
"아가씨, 다 왔습니다."
가마꾼의 목소리에 해온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혼례복 소매 아래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제부터 시작될 삶이 어떤 모양일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막막함에 가까웠다. 가마 문이 열리고,
해온은 낯선 저택의 마당에 발을 디뎠다. 위가의 대문 앞에서 배웅 나온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라 불러야 할 사람도, 심지어 동생인 아린(위아린)조차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늙은 집사 하나가 형식적으로 몇 걸음 따라 나와 인사치레를 건넸을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이 집에서 배웅이란 걸 기대한 적도 없었다. 열여덟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사람들에게 진짜 딸로 여겨진 적이 없었으니까. 신랑 측 저택은 위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웅장했다.
대들보 하나하나에 새겨진 문양부터, 마당을 가득 메운 하인들의 수까지 — 이 혼인이 단순한 혼사가 아니라 두 가문 사이의 무언가 무거운 매듭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정작 신랑은, 그 화려한 마당 어디에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다.
"신랑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를 맡은 몸종의 말에 해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마루를 지나 안채로 향하는 동안, 스쳐 지나가는 하인들의 시선이 묘하게 따가웠다.
동정도, 호기심도 아닌, 그저 '원수 집안의 딸이 여기 왜 왔나' 하는 싸늘한 관찰의 눈빛들이었다. 안채 문이 열리자,
방 안에 한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다. 창밖을 내다보는 옆얼굴은 서늘할 정도로 정갈했다.
해온이 방에 들어선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인사 올립니다. 위서연이라 합니다."
해온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는 오래도록 침묵만 흘렀다. 한참 만에야, 사내가 천천히 돌아섰다. 이율이었다.
첫눈에 봐도 서늘한 인상이었다. 짙은 눈매, 다문 입술,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눈빛. 그는 해온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본론만 말하지.
나는 이 혼인을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해온은 담담히 그를 마주 보았다.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서 하는 혼인이 아니라는 건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대답에 이율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 방을 가로질러
해온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별채를 내줄 테니, 거기서 지내라.
나와 마주칠 일은 되도록 만들지 않을 생각이니, 너도 그리 알고 처신해." 해온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단순한 무관심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겠습니다."
해온의 대답에 이율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해온은 천천히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다. 붉은 혼례복 자락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원수 집안의 딸이라….'
이율의 눈빛에서 스쳐 간 감정이 단순한 경멸만은 아니었다는 걸, 해온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낯선 위화감 —
어딘가 낯익은 듯한 그 눈빛의 정체 또한, 아직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저택 담장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앞으로 이 담장 안에서 펼쳐질 시간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감만이 어렴풋이 해온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해온은 창가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저택의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하인들이 혼례 뒷정리로 분주히 오가는 소란 속에서도, 해온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어차피 사랑받으려 온 곳이 아니니까.'
위가에서도 그랬듯, 이곳에서도 그저 버텨내면 될 일이었다. 다만 낮에 마주쳤던 이율의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냉랭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 눈동자 깊은 곳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뭐가 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해온은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며 등불을 밝혔다. 첫날밤은 그렇게, 서로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으로 저물어 갔다.
그러나 그날 밤, 이율 역시 홀로 남은 서재에서 붓을 들지 못한 채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해온은 알지 못했다.
낮에 마주친 그 담담한 눈빛이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