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진의 말대로, 그는 그 후로 자주 강씨 왕부를 드나들었다. 조정 일을 핑계 삼은 방문이었지만, 그때마다 그의 시선은 늘 서연을 향해 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하인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잦은 걸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부인, 요즘 바깥나들이는 통 안 하십니까."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이 벌써 몇 번째였다. 서연은 애써 예를 갖추며 거리를 두려 했다.
"별채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합니다."
"아깝군요. 이리 고운 분이 저택 안에만 갇혀 계시다니."
백무진의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서연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짧게 예를 갖추고 자리를 뜨려 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부인."
백무진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서연이 멈칫하며 돌아보자,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리 매번 피하시니, 오히려 더 궁금해지는군요."
서연은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음에도, 그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저는 왕야의 부인입니다. 그런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단호한 어조였다. 백무진은 그 반응에도 흔들림 없이 웃었다.
"압니다. 그러니 더 재미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서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정중한 듯 굴었지만, 그 시선과 말투에 담긴 위압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왕야께 말씀드려야 할까.'
서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스스로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한편 그날 저녁, 백무진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이며 낮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거참, 도도하기도 하지."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여느 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지금껏 그가 관심을 보인 여인들은 하나같이 그 앞에서 몸을 낮추거나, 은근히 호의를 바라며 다가왔었다. 그런데 서연은 달랐다. 매번 선을 긋고, 매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저항이 백무진의 마음속에 이상한 불씨를 지폈다.
'가질 수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애타게 만드는 건가.'
애초에 서연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왕부의 내부 사정을 살피고, 이율의 약점을 캐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패였다. 그런데 어느새 그 계산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거절당할수록, 무시당할수록 그녀를 향한 욕심은 오히려 짙어졌다. 이율의 부인이라는 사실조차, 이제는 그저 더 큰 자극으로만 다가올 뿐이었다. 지금껏 그가 원해서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서연의 단호한 거절은 익숙지 않은 갈증을 안겨주었다.
'저 여인은 반드시 내 손에 넣어야겠다.'
백무진은 잔을 비우며 낮게 되뇌었다. 정치적 명분이든, 개인적 욕심이든 이제 그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저 도도한 여인을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만이, 그의 안에서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때, 하인이 조심스레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공자님, 남가온 아씨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백무진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스쳤다.
"들라 하라."
잠시 후, 남가온이 들어와 예를 갖췄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강씨 왕부의 부인, 위서연 말입니다. 그자를 갈라놓을 방법이 있다면…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백무진은 그 말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마침 원하던 패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남 아씨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니, 저도 마다할 이유가 없군요."
"그럼…."
"함께 판을 짜봅시다. 다만, 서둘러 움직이진 맙시다. 급할수록 실을 놓치는 법이니."
남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하나는 질투로, 하나는 소유욕으로 — 각기 다른 이유였지만, 그 끝이 향하는 곳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