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왕부에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갈이 돌았다. 명절을 앞두고 인근 세도가들이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자리였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이름이 있었다.
"백무진 공자께서 오신다고?"
하인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오갔다. 백무진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조정 안팎으로 뻗은 세력과, 그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처세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가문의 세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제는 조정의 웬만한 대신들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서연 역시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몸종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저 대단한 세도가의 자제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백무진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훤칠한 키에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압도하는 여유로운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고, 강현묵을 비롯한 어른들에게도 깍듯이 예를 갖췄다. 웃는 낯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서연에게 닿았다.
"이분이 바로 왕야의 부인이시군요."
백무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서연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위서연이라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위가에서 이런 분을 며느리로 보냈다니,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미묘했다. 서연은 그 말의 결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쩐지 편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뵈니 소문이 오히려 부족했군요."
백무진의 시선이 서연을 좀 더 오래 머물렀다. 예의를 넘어서는 관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의 낯빛이 눈에 띄게 굳었다.
"백 공자, 오랜만입니다."
이율이 다가와 짧게 인사를 건넸다. 백무진은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맞았다.
"왕야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부인이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율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경계가 실려 있었다. 백무진은 그 반응을 즐기듯 옅게 웃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아 보이십니다. 정략혼이라 들었는데, 오히려 그 어떤 연애혼보다도 깊어 보이는군요."
칭찬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율은 별다른 대꾸 없이 서연의 곁을 지켰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백무진은 자리를 뜨기 전 다시 한번 서연에게 다가왔다.
"부인, 혹 시간이 되신다면 조만간 다시 뵙고 싶습니다. 조정 일로 왕부와 상의할 것이 있어, 앞으로 자주 걸음하게 될 듯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때는 좀 더 편히 말씀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왕야께서 부인을 워낙 아끼시니, 저도 자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요."
마지막 한마디에 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저 인사치레라 하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인 관심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이율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는 게 느껴졌다.
"백 공자, 늦은 시각입니다. 살펴 가시지요."
이율이 대화를 끊듯 끼어들었다. 백무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예를 갖췄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백무진은 그 말을 남기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 서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유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그날 밤, 이율은 서연의 처소를 찾아 낮의 일을 물었다.
"백무진이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하던가."
"그저… 인사치레였습니다. 다만…."
"다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고 싶다고, 조정 일로 왕부와 상의할 것이 있어 자주 걸음하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자를 조심해야 한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여도, 속을 알 수 없는 자다."
"왕야께서는… 그와 어떤 사이십니까."
서연의 물음에 이율은 잠시 침묵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그 모습에서, 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단순한 안면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된 악연이라고만 해두지."
이율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율의 낯빛에 스친 그 짙은 경계심이 단순한 걱정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백무진이라는 존재 자체를 두려워해온 사람처럼.
"앞으로 그자와 마주칠 일이 있거든, 반드시 나나 한서윤을 통하도록 해라. 혼자서는 절대 상대하지 마라."
이율의 당부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서연은 그 진지한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