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낮에 마주쳤던 이율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유재하와 함께 있던 걸 본 게 분명한데, 왜 그리 굳은 얼굴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질투라도 하신 걸까.'
서연은 그런 생각이 스치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일 뿐인데, 그런 감정을 품을 리가 없다고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할수록 자꾸만 그 굳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빗소리는 점점 굵어졌다. 서연은 등불 심지를 낮추고 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인, 주무십니까."
이율의 목소리였다. 서연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빗물에 어깨가 젖은 이율이 처마 아래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나온 듯,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시각에, 그것도 비를 맞고… 어인 일이십니까."
"…그냥, 지나던 길이었다."
핑계치고는 옹색했다. 서연은 그 어설픈 변명에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도 오는데, 잠시 들어오시지요."
"비도 오는데, 잠시 들어오시지요."
이율은 잠시 망설이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연이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낮에… 유 무사님과 함께 있는 걸 보셨지요."
이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인하려다,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편하셨습니까."
"…모르겠다."
이율은 스스로도 낯선 대답에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의 빗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처음엔 그저 원수 집안의 딸이라,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이율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연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혼례 첫날 그대에게 매몰차게 굴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곁을 내주지 않으면, 이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을 거라 믿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 자꾸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린다. 그대가 다른 사내와 나란히 있는 걸 보면 속이 좋지 않고, 다치기라도 하면 잠도 오지 않는다."
이율의 손이 조심스레 서연의 손 위에 얹혔다.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온기였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도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어렵게 다시 이었다.
"원수 집안의 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서연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처음 듣는 고백성 말이었다. 냉랭하기만 했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는… 그저 이 댁에 시집온 사람일 뿐인데."
"그래서 더 곤란하다."
이율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서연은 그 웃음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얼굴보다도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 낯설게 다가오는 표정이었다.
"저도… 왕야를 뵐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저 역시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껏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을,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의 손이 조용히 맞잡혔다. 창밖의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부드럽게 채워주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약속할 순 없다. 나는 여전히 갚아야 할 것이 있고, 그대는 아직 모르는 것들이 많다."
이율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이 마음만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서연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 오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이렇게 있어도 되겠습니까."
이율이 조심스레 물었다. 서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야."
그날 밤, 비는 새벽까지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두려움과 설렘을 함께 나누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밤만큼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