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는 요 며칠 사이, 이런저런 핑계로 서연과 마주칠 기회를 늘려가고 있었다. 왕부의 경비를 살핀다는 명목으로 별채 근처를 서성이거나, 마당에서 우연을 가장해 몇 마디를 주고받는 식이었다.
그날도 마당 끝자락, 오래된 매화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쳤다.
"부인, 오늘도 산책을 나오셨습니까."
유재하가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서연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로 답례했다.
"예, 날이 좋아서요. 무사님은 오늘도 순찰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대화 없이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유재하는 그 사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겨우 몇 번 마주쳤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편안한 걸까. 볼 때마다 확신이 짙어졌다. 걸음걸이,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 말끝을 흐리는 습관까지 — 하나하나가 그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특히 서연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어릴 적 그 아이와 똑같았다. 그 사소한 몸짓 하나가 유재하의 확신을 점점 더 굳혀가고 있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릴 적 기억이 있으십니까. 아주 오래전, 예닐곱 살 무렵의."
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릴 적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흐릿해서요. 유모의 말로는 어릴 때 크게 앓은 뒤로 그리되었다고 하더군요."
유재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역시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앓은 뒤로'라는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위가에서 둘러댄 핑계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렇군요. 실례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아닙니다. 왜 그러시는지…."
서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으려 하자, 유재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래전 알던 이가 부인과 닮아서, 자꾸 여쭙게 됩니다."
서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유재하에게는 유독 아프게 다가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걸, 두 사람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마침 지나던 길이었던 이율은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별다른 사이도 아닐 텐데, 웬일인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저자가 왜 자꾸.'
이율은 그 감정의 정체를 애써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내내,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의 뒷모습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유재하는 왕부 담장 위에 홀로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째 확신은 점점 짙어져 갔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정말 그 아이라면.'
서은월 대부인에게 알려야 마땅했다. 잃어버린 손녀를 몇 해나 애타게 찾아온 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서연에게 닥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수 가문에 심어졌던 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녀의 처지는 지금보다 훨씬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왕야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다 유재하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어릴 적의 그 풋풋한 마음이,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 있다는 것. 다시 마주친 그 얼굴 하나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줄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
유재하는 씁쓸하게 되뇌었다. 그녀는 이미 왕야의 부인이었다. 설령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한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그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살피는 것 — 유재하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몫이었다.
그럼에도 낮에 마주쳤던 서연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뒤를 스치듯 지나가던, 이율의 알 수 없는 시선도 함께 떠올랐다. 유재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낼 순 없었지만,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쪽도.'
유재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담장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별채 쪽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 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 마음을 어디에도 내보일 수 없다는 사실이,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