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로 돌아온 날 밤, 공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했지만, 안쪽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시선, 숨죽인 기척,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의 잔향.
연서는 창가에 서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았다. 어둠이 더 편했다. 빛이 있으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다시 노려진다. 지금은 그게 싫었다.
“…이제 시작이네.”
작게 중얼거렸다. 소진서는 물러난 게 아니다. 단지 한 발 물러나 판을 넓히고 있을 뿐이다. 그 남자는 항상 그랬다.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황을 움직이고, 마지막에 결과만 쥔다. 문이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연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왕야.”
소율한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걸음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무거웠다. 눌러 담은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다.
“…혼자 있지 마라.”
연서는 천천히 돌아섰다.
“…괜찮습니다.”
소율한의 시선이 곧바로 올라왔다.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아지는 상황이 아니다.”
짧았지만, 단정적이었다. 연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소율한이 한 걸음 다가왔다.
“…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을 꺼냈다.
“뒤를 붙였다.”
연서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자 쪽이다.”
짧은 설명.
“지금도 왕부 안에 들어와 있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연서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예상은 했습니다.”
소율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상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말. 연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번에는 분명히 묻는 질문이었다. 소율한이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밖으로 끌어낸다.”
짧았지만 분명했다.
“숨어서 건드리게 두면 계속 반복된다.”
“…이번에 끝낸다.”
그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연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였다. 짧은 충돌음.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비명.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소율한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열고 나갔다. 연서도 뒤따랐다. 복도는 이미 어둠 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검이 부딪히고, 숨이 끊어지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 그 사이에— 낯선 기척이 분명히 섞여 있었다.
“세자 쪽이다.”
확신에 가까운 말. 연서는 멈췄다. 상황을 읽었다. 이건 단순한 습격이 아니다.
확인이다. 그 순간— 한 명이 곧바로 뛰어들었다. 망설임 없이.
연서를 향해. 숨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연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찰나. 검이 가로막혔다. 소율한이었다. 정확하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뒤로.”
낮고 단단한 말. 연서는 한 발 물러섰다. 이번에는 따랐다. 더 나서지 않았다.
소율한이 완전히 앞을 막아섰다. 검이 다시 부딪혔다. 이번에는 더 거칠었다.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소율한의 눈이 식었다. 짧게 움직였다. 빠르게.
그리고— 끝났다. 상대가 그대로 무너졌다. 숨이 끊어진 정적.
소율한이 검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봤다. 연서를 확인했다.
그 시선이 짧지 않았다.
“…다친 데 있느냐.”
연서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확실하냐.”
조금 더 낮은 목소리.
“예.”
짧은 대답. 잠깐의 침묵. 소율한이 한 걸음 다가왔다. 연서의 손목을 잡았다.
확인하듯.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 머물렀다.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겁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군.”
연서는 눈을 들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소율한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도망치면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연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수록 더 따라옵니다.”
짧은 말. 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소율한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혼자 서 있는 거냐.”
연서는 피하지 않았다.
“…네.”
짧고 분명한 대답.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소율한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거리가 거의 사라졌다.
“잘 들어.”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건 네가 혼자 버틸 일이 아니다.”
연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소율한이 시선을 놓지 않은 채 이어 말했다.
“쫓아오는 쪽이 누구든—”
잠깐 멈췄다.
“…이제는 내가 상대한다.”
그 말은 짧았지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연서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이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선을 긋는 말이 아니라—
선을 넘어오는 말이었다.
“…그럼 저는요.”
조용히 물었다. 소율한이 바로 답했다.
“…내 옆에 있어라.”
짧았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혼자 판단하지 말고.”
“위험을 혼자 끌어안지도 말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조금 더 낮게 덧붙였다.
“…내가 놓치지 않게.”
연서는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날 밤.
왕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숨어서 흔드는 싸움이 아니었다. 서로를 끌어내고, 서로를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싸움이었다. 왕부의 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등불은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었고, 시녀들의 발걸음은 조용했으며, 경비 또한 평소보다 더 늘어 있었다.
하지만— 연서는 그 조용함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만든 고요였다. 숨기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생기는, 그런 종류의 정적.
창가에 서 있던 연서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멀리 마당 끝. 평소라면 보여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야 할 경비가, 그 자리에 없었다.
“…비었네.”
작게 중얼거렸다. 뒤에서 백운경이 반응했다.
“어디를 말씀하십니까.”
연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서쪽 담 쪽.”
짧은 말. 백운경의 표정이 굳었다. 그쪽은 일부러 병력을 배치해둔 구역이었다. 비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바로 몸을 틀었다.
“확인—”
그 순간이었다. 툭. 아주 작은 소리. 그리고—
등불 하나가 꺼졌다. 잠깐의 정적. 그 다음은 빨랐다. 콰직—!
문이 한 번에 부서졌다. 한 방향이 아니었다. 앞, 옆, 뒤. 세 방향에서 동시에 들어왔다.
검이 번쩍였다. 소리가 늦게 따라왔다. 백운경이 즉시 움직였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았다.
두 번째를 비껴냈다. 세 번째를 베어냈다. 하지만— 숫자가 달랐다.
연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건 살해가 아니다. 움직임이 다르다.
포위다.
“…”
결론이 나왔다. 그 순간— 한 명이 방향을 틀었다. 정확하게 연서를 향해.
연서는 몸을 틀었다. 피하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손이 들어왔다. 입이 막혔다. 숨이 끊겼다. 팔이 뒤로 꺾였다.
“읍—”
소리가 새어나오기 전에. 목 뒤에 차가운 감각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퍼졌다. 약.
연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힘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버티려 했다. 발에 힘을 주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 사이—
백운경이 한 명을 더 베어냈다. 피가 튀었다.
“…마마—!”
그의 목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연서를 붙잡은 손이 놓이지 않았다.
“확보했다.”
낮은 목소리. 확신에 찬 말. 연서의 시야가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건—
바닥에 번진 피와 무너지는 등불. 그리고— 자신을 끌어가는 그림자.
어둠이 덮쳤다.
같은 시각.
왕궁. 대전 안은 여전히 정적이었다. 임금, 대신들, 그리고 소율한.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소율한의 눈이 순간 멈췄다. 아주 미세하게.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소진서를 봤다. 정확하게. 그 순간.
소진서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확신. 성공했다는 표정. 그걸 보는 순간—
소율한의 눈이 완전히 식었다.
“…지금이군.”
낮게 말했다. 임금이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대답은 없었다. 대신— 대전 문이 열렸다. 내관이 뛰어 들어왔다.
숨이 가빠져 있었다.
“저하—!”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왕부에 습격이—!”
순간. 공기가 터졌다.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율한이 움직였다.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 나갔다. 임금의 목소리가 뒤에서 터졌다.
“섭정왕!”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더 이상 허락을 구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왕부. 소율한이 도착했을 때— 이미 끝난 뒤였다.
문은 부서져 있었고, 피 냄새가 짙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쓰러져 있었다. 백운경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피를 흘린 채. 하지만— 살아 있었다. 소율한이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봤다. 끌려간 흔적.
부서진 가구. 흩어진 옷자락. 그리고— 남겨진 천 조각.
연서의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
“…소진서.”
낮게 불렀다. 확신이었다. 이제는 의심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완전히 변했다.
이건 정치가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전쟁이었다. 눈을 떴을 때, 연서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이 낯설었다. 빛이 희미했다.
공기가— 차갑고, 오래된 냄새가 났다. 습기. 그리고… 피 냄새가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
“…여기.”
입을 열었지만 목이 말라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했다. 팔이 묶여 있었다. 단단하게.
발목도. 완전히. 연서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패닉은 의미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상황 파악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왕부. 습격.
약. 그리고— 납치.
“…생각보다 빠르네.”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깨어났군요.”
문 쪽에서 들린 목소리. 연서는 고개를 돌렸다. 소진서였다. 그는 여전히 단정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눈이 달랐다. 숨기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걸. 집요함. 그리고— 소유욕.
“불편하실 겁니다.”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봤다. 피하지 않았다.
소진서가 가까이 멈췄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연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예상은 했습니다.”
소진서가 웃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듭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연서는 아주 미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목적입니까.”
짧은 질문. 소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목적?”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아니요.”
천천히 말했다.
“이건 과정입니다.”
연서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
“…결과는 뭡니까.”
소진서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당신입니다.”
정적.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 시선이 잠깐 길어졌다. 그리고—
소진서가 천천히 웃었다.
“…역시.”
“이래서 놓기 싫은 겁니다.”
그 순간. 연서가 말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짧았다. 하지만— 날카로웠다. 소진서의 움직임이 멈췄다.
“저는 당신 것이 아닙니다.”
정적. 아주 짧은 시간. 그리고— 소진서의 눈이 변했다.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그래서.”
낮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가져오는 겁니다.”
그 말은— 완전히 선을 넘은 말이었다. 연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이 남자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왕부. 아니— 이미 왕부는 아니었다. 전쟁터였다.
소율한은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잡혀온 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피투성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
“…말해라.”
낮은 목소리.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어디냐.”
짧은 질문. 대답이 없었다. 한 명이 이를 악물었다.
“죽여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 검이 내려왔다. 목이 떨어졌다.
피가 튀었다. 정적. 소율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짧은 말.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다.
“서, 서쪽 외곽—!”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
“폐— 폐궁 쪽입니다—!”
그 순간. 소율한의 눈이 움직였다. 정확하게. 위치를 그렸다.
그리고— 돌아서 걸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그 시각.
왕궁. 정여주는 혼자 서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연서를 무너뜨리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 죽이는 게 아니라. 그런데—
“세자가…”
숨이 흔들렸다. 그 눈이 떠올랐다. 연서를 보던 눈. 그건—
단순한 이용이 아니었다.
“…미쳤어.”
그 순간. 정여주의 선택이 갈라졌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직접 끝낼 것인가. 그녀의 손이 천천히 쥐어졌다.
“…내가 끝낼 거야.”
낮게 말했다. 눈이 완전히 식었다. 연서를 향한 감정이— 이제는 질투를 넘어섰다.
없애야 할 존재가 되었다.
같은 시각.
소율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명령도 필요 없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멈추지 않는 이유를. 그의 눈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건 더 이상 권력 싸움이 아니었다.
단 하나.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기다려라.”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건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눈을 뜬 뒤로,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연서는 일부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묶인 손목이 조금씩 저려왔다.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묶는 방식이 거칠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쓴 흔적이었다.
“…더 기분 나쁘네.”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이번엔 노크가 있었다. 형식적인 예의.
연서는 눈을 들었다. 소진서였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찻잔.
그리고— 약재 향이 섞인 따뜻한 김.
“깨어 계셨군요.”
부드러운 목소리. 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봤다. 소진서가 천천히 다가왔다.
거리. 이전보다 더 가까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연서 앞에 무릎을 낮췄다.
“…뭐 하는 겁니까.”
연서의 말이 낮게 떨어졌다. 소진서는 웃었다.
“아프실까 봐.”
그는 자연스럽게 연서의 손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묶인 매듭을 풀었다. 조심스럽게. 마치—
망가지면 안 되는 물건 다루듯이. 연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자유로워진 손목.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소진서가 말했다.
“도망치실 생각은 안 하시는군요.”
연서는 짧게 답했다.
“가능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아니요.”
소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능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허락하면요.”
정적. 연서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럴 생각 없으시잖아요.”
“…”
소진서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맞습니다.”
솔직했다. 숨기지 않았다. 그게 더 불쾌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약입니다.”
“몸 상하지 않게 하려고.”
연서는 받지 않았다. 그저 보고 있었다. 소진서가 한숨처럼 웃었다.
“…이렇게까지 경계하셔도—”
잠깐 멈췄다.
“…이미 제 손에 계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연서의 눈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 말—”
짧게 끊었다.
“…기분 나쁩니다.”
소진서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그리고— 더 깊어졌다.
“…그래도 듣게 되실 겁니다.”
낮게 말했다.
“앞으로 계속.”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연서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손끝이 스쳤다. 순간.
연서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바로 손을 쳐냈다. 탁.
짧고 단단한 소리. 정적. 공기가 완전히 식었다. 소진서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는 그 상태로— 연서를 봤다. 한동안.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좋습니다.”
낮게 말했다.
“그 눈.”
“그 반응.”
“…다 알고 있습니다.”
연서의 눈이 더 차가워졌다.
“그만하세요.”
짧은 말. 하지만 분명한 선이었다. 소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싫습니까.”
연서는 대답했다.
“예.”
망설임 없었다. 정적. 소진서의 눈이 천천히 식었다. 그리고—
다시 뜨거워졌다.
“…그래서 더—”
잠깐 멈췄다.
“…놓기 싫은 겁니다.”
그 말은 집착이었다. 숨기지 않았다. 연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이 남자는— 이성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발걸음. 급한 기척. 소진서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온 것 같군요.”
연서의 눈이 흔들렸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누가 오는지— 알고 있었다.
소진서가 다시 연서를 봤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집요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낮게 말했다.
“…그 사람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울렸다. 닫혀 있던 공기가 한 번에 찢어졌다. 연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왔다.
소율한. 문턱에 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숨이 막히듯 눌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으로 전부 훑었다. 부서진 흔적.
묶였던 자리. 흐트러진 옷자락. 그리고— 소진서.
마지막으로, 연서에게 멈췄다. 그 눈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단 한 번. 그리고—
곧바로 가라앉았다.
“…서하를 놔줘.”
낮게 떨어진 말. 짧았지만— 감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소진서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작게 웃었다.
“이름까지 부르시네요.”
한 발, 연서 쪽으로 다가왔다. 느리게. 일부러. 도발하듯이.
“이 정도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늦은 거 아닙니까.”
연서의 손이 굳었다. 소율한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놓으라고 했다.”
이번엔 더 낮았다. 눌린 분노가 그대로 깔린 목소리. 하지만— 소진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연서의 턱을 잡아올렸다. 강하게. 연서가 바로 고개를 틀었다.
손을 쳐냈다.
“하지 마세요.”
짧지만 분명한 거부. 그 말이— 불을 붙였다. 소진서의 눈이 번뜩였다.
“…끝까지.”
천천히 말했다.
“…날 밀어내시겠네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끌어당겼다. 거리가 무너졌다. 숨이 부딪혔다.
강하게. 억지로. 입술이 붙잡혔다. 짧지 않았다.
놓지 않았다. 연서가 몸을 비틀었다. 밀어냈다. 옷깃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했다. 힘이 모이지 않았다. 숨이 흐트러졌다.
그 순간— 연서의 머릿속에 스쳤다. 소설 속의 소진서.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던 남자. 연서하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그저 쓰고 버리는 패.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건 뭐지.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끊어졌다.
소율한의 시선이 완전히 멈췄다. 전부 들어왔다. 다음 순간. 터졌다.
탁—!! 소율한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소진서를 거칠게 떼어냈다. 주먹이 먼저 꽂혔다.
피가 튀었다.
“손 떼.”
갈라진 목소리. 완전히 억눌렸던 분노였다. 소진서가 비틀리면서도 웃었다.
“…이제야.”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소율한이 멈추지 않았다. 다시 붙었다. 주먹이 또 떨어졌다. 이번엔 더 깊게.
“건드리지 말랬다.”
씹어내듯 말했다. 눈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연서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눈은 떼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었다.
소율한이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걸. 소진서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피가 턱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그래도.”
낮게 말했다.
“끝까지— 내 손에 있었는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소율한이 멈췄다. 아주 짧게. 그리고—
검을 들었다. 완전히 끝낼 생각이었다.
“…여기서 끝낸다.”
낮게 말했다. 이번엔 진짜였다. 돌이킬 생각이 없었다. 소진서도 검을 들었다.
눈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렇게는 못 보냅니다.”
마지막 발악. 집착.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이 부딪혔다.
짧고, 강하게. 한 번. 두 번. 세 번.
속도가 올라갔다. 소진서의 발이 밀렸다. 처음으로. 흔들렸다.
소율한이 파고들었다. 틈을 잡았다. 놓치지 않았다. 검이 들어갔다.
정확하게. 소진서의 몸이 멈췄다. 숨이 끊겼다. 시간이 아주 짧게 늘어졌다.
그 찰나— 스쳤다. 서하. 처음부터 버려질 패였다.
흔들릴 이유도, 남길 이유도 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써왔다. 그게 맞았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지. 왜— 놓지 못했지.
답은 나오지 않았다. 툭. 힘이 풀렸다. 무릎이 먼저 무너졌다.
검이 빠졌다. 피가 따라 흘렀다. 소진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흔들렸다. 연서를 향했다.
말은 없었다.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무너졌다.
정적. 완전히 끝났다. 연서는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이 아직도 고르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또렷했다. 소율한이 멈춰 섰다.
연서 앞에서. 한 걸음 거리.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그런데—
바로 잡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늦었다.”
낮게 떨어졌다. 거의 숨처럼. 연서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입술이 떨렸다. 눈이 젖었다. 참으려는 듯 숨을 삼켰지만—
결국 버티지 못했다. 눈물이 그대로 떨어졌다. 소리도 없이. 그냥—
무너졌다. 그 모습을— 소율한이 봤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한 걸음에 다가갔다. 그리고— 연서를 끌어당겼다. 강하게.
품 안으로. 연서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안겼다. 붙잡히듯, 기대듯. 그 순간—
소율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세게.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그대로 안고 있었다. 연서는 그 안에서 울고 있었다.
숨이 끊기듯 흔들렸다. 참고 있던 모든 게— 그 품 안에서 풀려나듯 터져 나왔다. 소율한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연서의 머리 위에 멈췄다. 소율한의 팔 안에서, 연서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숨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떨림도— 조금씩 멈춰갔다. 소율한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연서를 놓았다.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손이 여전히 닿을 거리. 서로를 확인하듯,
아주 가까운 거리. 연서는 눈을 들었다. 아직 젖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안정된 눈이었다. 소율한의 시선이 그 얼굴 위에 머물렀다. 짧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편안했다. 끝났다는 걸, 둘 다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하…”
숨이 끊어진 듯한 소리.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문 앞. 정여주였다.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눈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완전히 올라가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낮게 웃었다. 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이렇게 쉽게?”
연서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소율한이 바로 움직였다. 앞으로. 가로막듯.
정여주의 시선이 연서에게 박혔다.
“…끝까지— 당신이네.”
그 순간. 번쩍. 비녀가 튀었다. 망설임 없이.
직선으로— 연서를 향해.
“서하!”
소율한이 그대로 끌어당겼다. 연서의 몸이 확 끌려 들어갔다. 비녀가 스쳤다. 옷이 찢어졌다.
피가 얇게 번졌다. 짧은 상처. 하지만— 충분히 위험했다.
소율한의 눈이 완전히 변했다.
“…미쳤군.”
낮게 말했다. 이번엔 완전히 식어 있었다. 정여주가 웃었다.
“…이제야 보이네.”
숨이 흔들렸다.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였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단검.
숨겨두고 있던 것. 직접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막혔다.
탁. 소율한의 손이 정확하게 잡았다. 손목이 꺾였다. 힘이 완전히 눌렸다.
“놓—”
말이 끊겼다. 그의 힘이 더 들어갔다. 단검이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며 소리가 울렸다.
정적. 정여주의 눈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두려움이었다. 소율한이 말했다.
“…여기까지다.”
짧았다.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그는 더 보지 않았다. 손을 놓았다.
그리고— 뒤를 향해 말했다.
“처리해라.”
차가운 명령. 사람들이 움직였다. 정여주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연서를 보며 웃었다.
“…끝까지… 당신이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끌려갔다. 조용히. 완전히.
잠깐의 정적. 연서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소율한이 돌아봤다.
상처를 봤다.
“…괜찮으냐.”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짧았지만— 이번엔 진짜였다. 그 순간. 밖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들어왔다.
왕의 근위. 그리고— 임금. 늦게 도착한 얼굴.
상황을 보며 멈췄다. 피. 시신. 그리고—
두 사람.
“…이게 무슨 짓이냐.”
목소리가 흔들렸다. 권위가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소율한이 천천히 돌아섰다.
연서를 등 뒤에 둔 채. 완전히 막아서는 위치.
“…지금.”
낮게 말했다.
“누가 묻는 자리입니까.”
정적. 임금의 표정이 굳었다. 소율한이 한 걸음 다가섰다.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게 누군지.”
“아직도 모르십니까.”
말이 아니라— 판결이었다.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근위들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순간— 결정이 내려졌다. 소율한이 검을 들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내려갔다. 짧았다. 완전히 끝났다.
정적. 왕궁의 판이 뒤집혔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왕부.
아니— 이제는 다른 이름이 될 곳. 연서는 창가에 서 있었다. 바람이 조용히 들어왔다.
모든 게 끝났다. 정말로.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익숙한 걸음.
소율한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섰다. 같은 방향을 봤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연서가 먼저 말했다.
“…끝났네요.”
소율한이 답했다.
“…이제 시작이다.”
짧은 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들렸다. 연서는 그 말을 곱씹듯 가만히 서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스쳤다. 돌아가야 할 이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 그게— 이제는 흐릿했다.
아니. 사라진 것 같았다. 연서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소율한을 봤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변하지 않은 사람. 그런데—
가장 많이 달라진 사람. 연서는 조용히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자연스러웠다.
“…그럼.”
연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제가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소율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조금 더 깊어졌다.
“…이미 하고 있지 않나.”
짧은 대답. 연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섰다.
그의 옆에.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알았다. 이건—
끝이 아니라. 서로를 선택한 시작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