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한 번 바뀌었다. 표절 의혹도, 유설과 제갈도진이 벌였던 그 모든 사건도, 이제는 회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
"채령아, 이거 이번 시즌 메인 프로젝트 시안이야. 검토 좀 해줄래?"
팀장의 요청에, 채령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팀 내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력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채령 씨, 이번 시안 진짜 좋은데요. 역시 믿을 만해요."
동료의 칭찬에, 채령은 옅게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한때 그녀를 향했던 의심과 냉대는, 이제 완전히 신뢰와 인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퇴근길, 채령은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낯선 재회, 서투른 고백, 그리고 견뎌내야 했던 수많은 위기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이 평온함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날 저녁, 백결은 채령을 데리고 낯익은 장소로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 재회했던 회사 로비, 그리고 처음 마음을 확인했던 한강변 레스토랑을 지나,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조용한 옥상 정원이었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인데."
채령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은은한 조명이 정원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둔 곳이야."
백결의 말에, 채령은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어. 아주 특별한 날."
백결이 그녀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손에는 작은 반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결아."
"채령아. 우리, 십 년 전 그 교실에서 시작된 인연이었잖아. 그때는 서로 마음을 전하지 못해서, 십 년을 돌아왔지만."
백결의 진지한 목소리에, 채령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십 년 동안, 나는 늘 채령이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어. 그리고 다시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마음이 흔들린 적 없었어. 유설이 일도, 도진이 일도, 다 함께 겪어내면서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됐어."
백결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가는 길 없이 곧장 가고 싶어. 나랑 결혼해줄래?"
채령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물을 흘렸다. 학창시절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그 사람이, 지금 이렇게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꿈처럼 벅차게 느껴졌다.
"…응. 할게. 결혼하자, 우리."
백결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워주고,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해, 채령아."
"나도 사랑해, 결아."
두 사람의 입맞춤 위로, 옥상 정원의 불빛이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몇 주 후, 회사 근처 작은 웨딩홀에서는 태오와 하린이 나란히 앉아 채령과 백결의 청첩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와, 진짜 결혼하는구나."
하린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십 년 걸린 짝사랑이 이렇게 결혼까지 이어지네."
태오도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근데 태오 씨, 우리는 언제쯔음?"
하린이 슬쩍 장난스레 물었다. 태오는 그 물음에 잠시 멈칫하다가, 담담하게 답했다.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어요. 저도 하린 씨랑 있으면, 자꾸 그런 미래가 그려지거든요."
하린은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옅게 웃었다. 결혼식 날, 하얀 꽃으로 장식된 예식장 안에서 채령과 백결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령의 모습에, 백결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봐."
채령이 수줍게 물었다.
"그냥, 너무 예뻐서. 십 년 전에도 이렇게 예뻤는데, 그때는 왜 말 한번 못 걸었는지 모르겠어."
백결의 담백한 감상에, 채령은 옅게 웃음이 났다.
"…신랑, 신부는 어떤 순간에도 서로를 믿고 지지하며 살아가겠습니까?"
주례의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힘차게 답했다.
"네."
하객석에서 하린과 태오, 그리고 오랜 시간 두 사람을 지켜봐 온 이들이 따뜻한 미소로 축하를 보냈다. 팀장과 동료들, 그리고 백결의 아버지까지, 모두가 진심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고 있었다.
십 년의 시간을 돌아, 우연을 가장했던 그 모든 인연이, 마침내 진짜 사랑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식이 끝난 후, 하린이 눈물을 훔치며 채령에게 다가왔다.
"…채령아, 진짜 축하해. 너 그동안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더 값지게 느껴져."
"고마워, 하린아. 네가 그동안 계속 옆에서 지켜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쏟아냈다. 태오도 그 옆에서 백결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를 전했다.
"…십 년 짝사랑 끝에 결혼이라니, 진짜 영화 같다."
"그러게. 근데 이제 다음은 너희 차례 아니야?"
백결의 농담에, 태오와 하린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저희도, 천천히 준비하고 있어요."
하린의 대답에,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채령은 백결의 손을 꼭 잡은 채,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봤다. 더 이상 불안도, 위협도 없는, 오직 서로를 향한 굳건한 믿음만이 남은 미래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지."
채령의 속삭임에, 백결이 다정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 이제부터, 평생을 함께할 시작이야."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손을 맞잡고, 환한 웃음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