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20화 · 전체 30

흔들리는 확신

글 · 힐링아무

며칠간 이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에 쥔 낡은 서찰 한 장이, 그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서연이 위가의 친딸이 아니라면, 지금껏 자신이 그녀에게 품어온 원한과 경계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혼례 첫날, 매몰차게 쏘아붙이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원수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어두었던 모든 선이, 애초에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동시에, 섣불리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저 서찰 한 장,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정황뿐이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착각이라면, 괜한 기대만 품었다가 다시 무너질 게 뻔했다. 게다가 그런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복수의 명분을 스스로 흔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율은 강현묵을 찾아 그 서찰을 내밀었다.

"아버님, 이걸 봐주십시오."

강현묵은 서찰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더니, 낯빛이 서서히 변했다.

"이건…."

"부인이 위가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황입니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강현묵은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동안 품어온 원한의 절반은 애먼 곳을 향한 셈이 된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위가의 위증죄는 별개의 문제다. 그건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다만 며느리의 출생 문제는… 좀 더 신중히 접근해야겠구나. 확실치 않은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그녀의 입지만 더 위태로워질 뿐이다."

이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묵의 말이 옳았다. 위가의 죄와 서연의 출생은 별개로 다뤄야 할 문제였다.

서재를 나선 이율은 곧장 별채로 향하지 않았다. 아직 서연에게 이 사실을 알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괜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녀에게 저질러온 지난날의 냉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날 낮, 마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왕야,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니다. 잠을 설쳐서 그렇다."

이율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서연의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하기가 유독 힘들었다. 그녀가 이런 다정한 얼굴로 자신을 챙길 자격이, 정작 자신에게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이율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서연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그날 밤, 이율은 별채 마당을 서성이다 결국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등불이 켜진 창 너머로, 서연이 조용히 수를 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저렇게 담담히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내가 그동안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이율은 씁쓸하게 되뇌며 어둠 속으로 몸을 돌렸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서연이 감당해야 할 혼란과 상처가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에, 자신이 그녀에게 가했던 매몰찬 냉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어릴 적, 헛간에서 자신을 숨겨주던 그 작은 손길. 그리고 지금, 아무 원망도 없이 이 낯선 집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서연의 모습. 그 둘이 같은 사람이라면 — 이율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오는 걸 느꼈다.

이율은 결심했다.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기 전까지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기로. 그리고 그때가 오면,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을 온전히 마주하기로.

낮에 마주쳤던 서연의 담담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담담함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이제 머지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자신이 그녀에게 지은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이율은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했다.

20화 끝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