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HARAVERSE STUDIO
복수하려 했는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18화 · 전체 30

함정

글 · 힐링아무

남가온은 서연 앞으로 짧은 서신 하나를 보냈다. 왕부 인근 별당에서 조용히 뵙고 싶다는, 오해를 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계속 껄끄러운 사이로 지내는 것도 좋지 않다 싶어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다니, 다행이지.'

서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별당으로 향했다. 남가온의 진짜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녀로서는, 이 만남이 화해의 자리이길 바랄 뿐이었다. 별당에 도착한 서연을 맞은 건 남가온이 아니라, 낯선 하인이 내온 차 한 잔이었다.

"아씨께서 곧 오신다 하셨습니다. 먼저 목이라도 축이고 계시지요."

별생각 없이 차를 마신 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건….'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서연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은 시각, 유재하 역시 왕부 밖에서 걸려온 전갈을 받고 별당 근처로 불려 나온 참이었다. 서연이 위급하다는 거짓 전갈이었다.

이율은 그날 저녁, 우연히 한서윤에게서 서연이 남가온의 서신을 받고 별당으로 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최근 남가온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남가온이 언제부터 부인과 그리 가까웠단 말이냐."

이율의 물음에 한서윤도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만…."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이율은 지체 없이 별당으로 말을 몰았다. 말을 달리는 내내, 불길한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갔다. 도착한 별당 안, 방문을 박차고 들어선 이율의 눈에 들어온 건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서연과, 마침 그 곁에 다급히 다가서던 유재하의 모습이었다.

"부인! 정신 차리십시오!"

유재하가 서연을 흔들어 깨우려던 찰나였다. 이율의 눈에 그 광경은 순식간에 다른 의미로 각인됐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짓이냐."

이율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유재하는 순간 상황을 알아채고 다급히 손을 들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부인께서 차에 무언가 섞인 걸 드신 듯합니다!"

이율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질투와 의심이 이성을 짓누르는 와중에도, 서연의 흐트러진 숨소리와 핏기 없는 낯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서연을 품에 안아 들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됐다."

이율이 유재하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너는 여기서 물러나라."

유재하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나설수록 오해만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알았다. 서연을 품에 안고 별당을 나서는 이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재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책임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

왕부로 돌아오는 내내, 이율의 품 안에서 서연은 미약하게 신음할 뿐 눈을 뜨지 못했다. 이율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질투로 이성을 잃을 뻔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고, 이런 비열한 짓을 꾸민 자에게는 더 큰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 짓인지, 반드시 밝혀내겠다.'

이율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날 밤, 의원이 다녀간 뒤에도 이율은 서연의 처소를 떠나지 않았다. 열에 들뜬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그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새벽 무렵, 서연이 옅게 눈을 떴다.

"…왕야?"

"깨어났나."

이율의 목소리에 안도가 짙게 묻어났다. 그는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며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서연은 아직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 다정한 손길과 온기만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곁에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율은 그녀의 손을 꼭 마주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눈 붙여라. 내가 곁에 있을 테니."

서연은 그 말에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이율은 동이 틀 때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편 별당 근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남가온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상황에 낯빛이 굳었다.

'왜 벌써 온 거지.'

계획대로라면 좀 더 시간을 끌어, 누군가 더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율이 너무 빨리 당도하는 바람에, 판이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튿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백무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이번엔 아쉽게 됐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씨앗은 이미 뿌려졌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면 그만이지요."

남가온은 그 여유로운 태도에 오히려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백무진의 말대로, 이미 벌어진 소동만으로도 왕부 안에는 또 다른 소문의 불씨가 지펴진 뒤였다.

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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